작년에 ‘시’라는 제목의 영화를 이창동 감독이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호기심과 함께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시를 주제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낼지가 궁금했다. 더구나 주인공이 윤정희라는 소식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나름대로 기다리던 영화 ‘시’가 이번에 개봉되었고, 칸 영화제에서는 각본상도 받았다.
‘시’를 본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먹먹한 감정이 가시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느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도 않는다.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안타깝고 혼란스럽다. 그 이유는 미자(美子)의 삶이 나와 동일시되기 때문인 것 같다. 고단한 현실을 시로 승화시키려는 미자를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만난다. 미자에게 시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는 환상인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꿈이 크면 클수록 현실과의 괴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다면 이 고단한 현실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어떤 종류의 것이든 환상 없이는 누구도 이 고단한 삶을 견뎌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상이 크면 클수록 현실과의 갈등도 더 커진다. 예술 또한 인간이 품는 환상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미자가 시 쓰기에 매달리는 것도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된다. 미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미자의 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 꿈과 환상으로 인하여 미자는 이 궁핍한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미자 같이 여린 감성의 소유자에게 세상은 넘기 어려운 장벽이다.
미자가 아름다운 것은 고운 마음씨뿐만 아니라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에 있다. 현실을 넘어서고자 할수록 갈등은 커지지만 미자는 굴복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등장하여 대비를 이룬다. 죄의식이나 측은지심은 없이 이기적이고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 군상들이다. 그들은 현실의 물질세계에 만족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들 대부분의 모습이다. 그러나 미자는 죽은 소녀를 끝까지 잊지 못하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삼키며 운다. 마지막 장면에서 졸졸 소리를 내며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영화에 나오는 몇 개의 삽화 같은 장면들도 인상 깊다. 시 강습 모임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하는 장면도 그중 하나다. 그들의 진솔한 얘기에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또, 시 낭송회에서 음담패설로 웃기는 경찰도 재미있다. 미자는 시를 모독한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더러운 세상에 대해 그런 식의 냉소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낭송회 뒤의 회식 자리에서 시를 비웃는 젊은 시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위악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영화 ‘시’는 진실 되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생각게 한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소녀의 시체를 배경으로 ‘시’라는 제목이 하얗게 부각되는 첫 장면도 의미 깊다. 이 비루한 현실을 살아낸다는 것이 대단한 일인가, 아니면 뻔뻔스러운 일인가, 영화관을 나서며 불현듯 떠오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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