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추억

샌. 2010. 5. 11. 17:08

서점에 들렀다가 장석주의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샀다. 글을 읽으며 역시 장석주라는 찬탄이 절로 나왔다. 장석주의 글은 깊으면서도 진솔하다. 글이나 작가도 개인적 취향에 따라 호오가 달라지겠지만 나에게는 장석주의 글이 좋다. 작가가 일으킨 파문이 전해져 공명을 일으키면서 내 마음 깊은 데를 두드린다. ‘어느 날 우유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알 수 없는 공허감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이런 평범한 문장도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울린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은 부제가 ‘장석주의 장자 읽기’다. 본인의 삶과 장자가 ‘느림과 비움’을 주제로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책 내용 중에서 추억에 대해 쓴 부분이 있다. 장석주가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직접 옮긴다.

----------------------------------------------------------------------------------


세월은 가면서 추억을 떨어뜨려 놓는다. 추억은 그림자같이 내내 우리를 따라다닌다. 추억은 자란다. 어린 시절의 나무가 자라고, 창문이 자라고, 돌계단이 자라듯 추억은 자란다. 추억 속에서 한 번의 작별은 1백 번의 작별로 늘어나고, 잃어버린 한 켤레의 신발은 1백 켤레의 신발로 늘어난다. 추억 속에서 새의 지저귐은 1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늘고, 물은 늘 새로 솟아나 항상 맑은 물로 흐른다. 추억의 마법이 없다면 인생은 한결 단조로워질 것이다. 나는 철책 안에서 우울한 눈빛으로 서성이는 늑대도 아니고, 동해에 나타난 귀신고래도 아니다. 나는 8할이 추억으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인류의 일부다.


추억은 내가 걸어온 길의 이정표다.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그 이정표들은 늘 제자리에 서있다. 현재는 미래이다가 오늘이 되었다가 다시 과거의 화석이 되어 버린다. 추억에는 짙은 우수가 어린다. 추억은 시간의 미망인인 까닭이다. 밤의 달은 흘러가버린 낮에 떠있던 태양의 미망인이다. 우리는 그 미망인들을 통해 연민을 보낸다..... 나이가 들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길어지면 누구나 불가피하게 추억의 부자가 된다. 추억은 양식이다. 우리는 추억으로 밥을 짓고, 그것을 꾸역꾸역 삼킨다. 내 살과 피는 추억이 만든 것이다.


추억은 기억이 잃어버린 아들이다. 어느 날 잃어버린 아들은 탕자가 되어 돌아온다. 돌아온 탕자는 밥을 먹고 기나긴 낮잠에 빠진다. 이마가 반듯하고 눈이 맑은 아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탕자는 머리가 크고 이마에는 흉한 상처도 있다. 아무리 봐도 그 아들의 모습은 낯설다. 어린 계집애들은 벌써 허리가 굵고 엉덩이가 펑퍼짐한 아줌마로 변신한다. 우리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지만, 그 아줌마가 소년 시절에 연모하던 그 어린 계집애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가슴과 목 사이를 가로지르며 튀어나온 그 여자애의 쇄골을 떠올리며 나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번민과 괴로움으로 지샜던가. 그 쇄골은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새 같다. 잘 지냈어? 그래. 잘 살았지. 어린 계집애의 흔적이 없는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무르익은 자두처럼 여자의 향기가 그녀의 주변에 흥건하게 번진다. 어젯밤 하늘에서 별똥별 두 개가 흘러갔다. 하늘에는 별똥별이 지고, 땅에서는 목백일홍의 꽃잎들이 바람에 날렸다. 바람이 부는가, 어둠 속에서 깃발이 펄럭였다. 추억이 낯선 것이라면 그 낯선 것과 마주서는 것이 인생이다.


추억은 삶에서 찢겨져 나온다. 내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인 건 오로지 추억의 질료들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추억의 질료들로 빚어진다. 추억의 질료들은 말랑말랑하다. 이를테면 여름의 끝자락, 빈 모래톱, 하늘 위를 떠가는 철새들, 푸른빛을 잃고 쓰러진 갈대들, 만산홍엽, 어떤 송별회,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당신, 오후 네시, 구름의 이동, 새가 앉았다 날아간 빈 가지,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선율, 이웃집에서 들리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대전역에서 놓친 열차, 눈꺼풀 위로 쏟아져 내리던 잠, 닫힌 문, 당신이 없는 빈집, 너무 멀리 떠나와서 아득히 돌아보는 다시 가야 할 길, 눈썹이 까만 소녀의 웃음, 이국 호텔의 편지지에 끼적인 몇 구절, 내 발바닥의 신경세포에 새겨진 카리브해 모래의 뜨거움, 노랗게 돋은 움들, 저 혼자 떨어져 산길에 구르는 솔방울들, 길바닥에 깔린 늦가을의 죽은 매미들, 무서리가 내린 새벽, 모두가 돌아가 텅 빈 학교의 복도에 떨어진 해질녘의 음영, 젊은 아버지의 수고, 첫 키스, 첫 번째 거짓말, 마른 풀로 만든 작은 새둥지, 닿기만 해도 부서져 내용물이 쏟아질 듯 얇은 껍데기를 가진 새알들, 소맷단이 닳은 셔츠, 물에 젖어 부푼 책들...... 추억은 공공적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개인에게로 귀속한다. 잘려진 나무가 오로지 탁자의 네 귀퉁이만을 받들고 있듯이.


추억은 분실물 보관소에서 보관하지 않는다. 추억의 지정된 거소는 항상 내면 기억이다. 스물 몇 해 만에 고향에 들른다. 기억을 더듬어 태어나고 자란 생가를 찾는다. 나는 그 집을 끝내 찾지 못했다. 그 집은 오래전에 헐렸고, 그 집터는 텃밭으로, 축사로 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앞에 우두커니 섰다가 돌아섰다. 노년에 이르러 추억을 완전히 망실하는 자들도 있다. 끔찍하다. 우리는 그들을 치매환자라고 부른다. 외할머니는 팔순을 넘긴 뒤 돌연 모든 추억을 잃어버렸다. 그때 외할머니는 천명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할머니는 자신이 낳은 큰딸을 보고, 아주머니는 어디서 오셨어요? 라고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치매환자들은 회로애락의 볼륨이 없는 백지와 같이 밋밋한 삶을 산다. 머릿속에 어떤 추억도 없다면 존재는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추억이 없으면 삶도 없고 전생도 내생도 없다. 추억은 파괴와 죽음으로 가득 찬 부정의 대양이다. 그 속에서 꽃과 생명과 명확성이 태어난다. 나는 추억의 피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자다. 나는 추억을 잃어버릴까봐 두렵다. 추억을 잃는 것은 삶의 정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늙어 찾아오는 자식도 없고 더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 그게 바로 추억의 황홀경이다. 추억은 잉여의 삶, 여분의 삶이다. 노인들이 추억에 한사코 매달리는 것은 삶을 다 탕진하고 오직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늘 추억이라는 빵을 굽는다. 그리고 아무라도 붙잡고 그 빵을 건넨다. 인생이 상승의 기운을 탈 때 추억의 가치는 줄어든다. 추억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젊은 사람은 추억이라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진주의 빛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 자체로 활력이 넘치고 삶이 빛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젊지 않다. 나는 추억에서 돌아와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아래 오래된 목탑같이 서있다.


추억은 식은 밥같이 현재라는 생동감이 빠진 삶이다. 추억은 아무리 화려해도 추억일 뿐이다. 추억은 통용되지 않는 구화폐다.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쓸모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추억의 중요성을 자주 간과하고, 추억의 근원을 탐구하는 일을 멸시한다. 집단기억이란 우리 피에 새겨진 종 전체로서의 추억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 그것은 계통 발생의 기억으로, 집단무의식으로 진화한다. 진화하지 않는 추억은 기억의 밑층에서 화석으로 변한다. 추억은 우리를 인류, 즉 위대한 어머니라는 배에 맨 부표와 같다. 그것이 배에서 풀려나면 부표는 방향 없이 무의미의 바다를 표류한다. 나는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의 속도로 인류를 빠져나가는 추억이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 기상사진전  (0) 2010.06.01
  (2) 2010.05.24
우리 의사 선생님  (0) 2010.05.03
미실  (0) 2010.04.26
추노  (6) 201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