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향기

봄의 전령사, 생강나무꽃

샌. 2012. 3. 30. 07:26

 

환히 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을 뒷산에서 만났다. 봄꽃을 만나러 멀리 나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생강나무꽃이야말로 봄의 전령사다.

 

오래 전 나무와 꽃에 친해질 무렵, 관악산에 올랐을 때도 이맘 즈음이었다. J가이 나무 줄기 끝을 꺾어주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생강 내음이 났다. 처음에는 산수유와 헷갈리기도 했지만 다른 것에 비하면 쉽게 알게 된 생강나무와 꽃이었다.

 

<나무가 민중이다>라는 책을 읽고 있다. 마침 생강나무를 설명한 부분이 있어 일부를 옮긴다.

 

이른 봄, 채 겨울 모습을 벗지 못한 갈색 산을 배경으로 잎이 나기도 전에 노오란 솜뭉치 같은 꽃을 피우는 나무, 꽃자루도 없이 가지에 듬성듬성 꽃을 피워, 황량함 속에 노오랗게 대비되는 희망 같은 여백의 미를 발산하는 생강나무는 목련목 녹나뭇과의 낙엽활엽수로 관목과 교목의 중간 형태를 띤다.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의 일부이다.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는 중부 이북지방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 또는 '올동백' '동박나무'라고 불렀다. 그 열매에서 짜낸 기름으로 밤에는 등잔을 밝혔고 여인네들의 머릿기름으로도 사용했으며, 연한 잎은 찹쌀가루 입혀 튀기는 '부각'을 만들어 먹는 데 제격이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만

잠시잠깐 임 그리워 난 못 살겠네

 

"님도 보고 뽕도 따고'에서 보듯 농촌에서 선남선녀의 만남은 대개 일을 빙자하여 주변의 눈을 멀리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최고였다. 그러니 등잔기름으로 머릿기름으로 동백 열매를 채취하던 시절 동백을 핑계로 님을 만나러 싸릿골로 가던 중 강을 앞에 두고 마음 급한 어느 청춘의 정선아라리 가사가 애절하다.

 

내게 있어서 생강나무는, 이따금 쪽진 머리를 풀어 감은 뒤, 곱게 참빗질을 하신 후 동백기름을 발라 단장하시곤 귀퉁이가 깨져 벽에 도배해놓은 세경 앞에 앉아 낡은 양은비녀를 찔러넣던 어머니의 비교적 젊은 시절의 아득한 창(窓)이다. 환갑이 다 되도록 쪽진 머리를 고수하시다가 '고만이'(재물이나 벼슬이 더 오르지 못하도록 막는 존재) 막내아들의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자, 오래도록 서울에서 식모살이 하던 병섭 어머니를 따라 나서던 길에 등 떠밀려 난생처음 들어선 신림미장원에서 그 어색했던 파마머리를 위해 잘린 눈물겨운 사연과 함께.

 

어머니는 뒤뜰에 생강나무 한 그루를 키워놓으셨다.

 

"이게 예전에는 아주 요긴하게 쓰던 동박나무란다!" 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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