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이 되면 외할머니를 따라 대구 이모 집에 놀러가곤 했다. 그때가 1960년대이니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산골 촌놈이 유일하게 도시 구경을 하게 되는 때라 이모 집에 갈 수 있는 방학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당시에 이모 집은 달성공원 앞 대신동에 있었다. 나에게 대구하면 달성공원과 대신동의 한옥집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사업을 하셨던 이모부는 아침이면 달성공원에 나가 정구를 치셨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꼭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나는 정구 치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그러다 심심하면 공원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모부는 공원뿐만이 아니라 시내에 나가실 때도 나를 데리고 가시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다방에 앉아 어른들의 사업 얘기 하는 걸 어색하게 들어야만 했던 기억도 난다.
이번에 어머니를 모시고 대구 이모 집에 놀러 갔다. 집안 경조사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다니러 간 것은 그때 이래로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외할머니나 이모부는 돌아가셨고 갓난아기였던 사촌동생들은 이미 40대의 나이가 되었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이모의 안내로 인근 두류공원도 둘러보았고 동생의 직장인 대구가톨릭대학에도 가 보았다. 그리고 이모의 옛날 집과 달성공원에도 들렀다.
대신동은 옛 모습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서문시장, 자갈마당 같은 지명들이 익숙했고 특히 이모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있어 감회가 컸다. 대문도 당시 모습 그대로였고 낡았을 뿐 색깔까지도 똑 같았다. 개조하여 변한 집들도 많았지만 좁은 골목길은 여전했다. 40여 년 전에 한 소년이 저 골목길을 따라 달성공원으로 놀러 다녔다. 당시 대신동은 한옥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지금은 낡고 작고 낙후되어 보이지만 그때 촌놈의 눈에는 아름답고 멋진 집들이고 동네였었다.
달성공원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넓은 구역이 동물원으로 변해서 옛 흔적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웠다. 찬바람이 불어선지 더욱 썰렁하고 허전했다. 아니면 십대의 소년과 반백의 중년 사이에 가로놓인 세월의 깊이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가 본 유년시절의 풍경들은 대개 그런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것은 단지 변한 풍경 탓만은 아닌 것 같다. 풍경과 존재의 감각 사이에는 일치나 따스함보다는 어긋남이나 쓸쓸함이 더 크다.
공원에서는 세 그루의 고목이 눈에 띄었다. 참느릅나무는 나이가 130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수령이 다한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또한 멋있는 줄기를 가진 향나무와 ‘서침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회화나무도 있었다.
달성(達城)은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방을 지배하던 부족이 쌓은 성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이 안에 경상감영을 두고 석축을 더했다는데 달성공원은 굉장히 역사가 오랜 터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님과 이모님을 모시고 달성공원에 간다고 하니까 이종사촌들이 거기에는 할아버지들이 많다고 해서 웃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대구의 달성공원은 내 유년의 추억이깃든 소중한 장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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