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8

우리 시대 산상수훈 / 고정희

내 뒤를 따르고 싶거든 남의 발을 씻겨주라 씻겨주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기 자랑 시대, 남의 발 씻기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몸종이라 부르네 내 십자가를 지고 싶거든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남북분단 시대, 그대를 세상은 빨갱이라 부르네 내 기적을 알고 싶거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밀고 오 리를 가라 하면 십 리까지 따라가라 따라가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먹이사슬의 시대, 몸을 달라 하면 쓸개까지 주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창녀라 부르네 내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땅에서 가난하라, 땅 위에 재물을 쌓지 마라, 주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본독점 시대, 오직 가난한 이 여기 있으니 그대..

시읽는기쁨 2013.09.09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시장 한구석,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고단한 사람의 굽은 등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어떤 산해진미보다 ..

시읽는기쁨 2011.12.23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 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시읽는기쁨 2010.11.20

사랑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맹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사랑법 첫째 / 고정희 오늘이 어린이날이다. 마침 어제는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10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 국제 비교'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도는 54% 정도로 OECD 20개 나라 중 꼴찌를 기록했다. 가장 큰 이유가 학업 스트레스와 부모와의 갈등 때..

시읽는기쁨 2010.05.05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고정희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를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 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산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그리움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시읽는기쁨 2009.03.31

빈 들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의 빈 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쓸쓸합니다. 논과 밭의 결실을 끝냈는데도 농촌에는 무기력과 한숨만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만나는 농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작금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농업 정책이 세계화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다고도 하고, 이 방법이 농민을 위하는 유일한 거라면서 나라 살림 맡은 이들은 달래지만 살림살이는 해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갑니다. 몸이 부서져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우 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점점 멀어집니다. 농사에 뜻을 두고 투자를 한 사람이라면 빚만 늘어나기 십상입니다. 농민들은 이것을 농업을 포기한 농정 정책 탓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반도체를 수출하는 대..

참살이의꿈 2005.11.14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

시읽는기쁨 2004.06.17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 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그녀는 시대의 고통에 같이 아파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아깝게도 4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시읽는기쁨 200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