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9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멋진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에 그리움 하나를 품고 있는 것일 게다. 그리움은 그가 내 옆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결핍의 감정이다. 어쩌면 소유욕의 일종인지 모른다. 사전에서는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움 중에는 짝사랑 같은 일방통행식 그리움도 있고, 사람이 아닌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시읽는기쁨 2022.05.01

무당벌레 / 김용택

아랫도리를 발가벗은 아가가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쪼그려 앉더니 뒤집어진 무당벌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듭니다. 무당벌레가 뒤집어지더니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갑니다. 아가가 우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가리키다가 자기 손가락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 무당벌레 / 김용택 어린아이는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었다고 여긴다. 하늘의 구름과 내리는 눈은 살아있지만, 정원의 꽃나무는 죽은 것이다. 뒤집어져 움직이지 못하던 무당벌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자기 손가락이 닿으니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것이 경이 그 자체다. 어린아이는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하다고 부를 수도 있고, 순수..

시읽는기쁨 2012.12.16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 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구절초꽃 / 김용택

꽃들의향기 2012.09.25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오늘은 좋은 당신에게 이 시를 보냅니다. 어느 날 고운 미소로 다가온 당신은 이제 내 마음 속에 꽃으로 피었습니다. 당신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당신의 향기는 내 주위를 감싸돌며 늘 나를 취하게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아, 당신은 생각만 해도 참 좋은 사람입니다.

시읽는기쁨 2008.07.08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 / 김용택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 아, 농사는 우리가 쎄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덜이 편히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며루 땜시 농사 망치는 줄 모르고 나락도 베기 전에 풍년이라고 입맛 다시며 장구 치고 북 치며 풍년잔치는 저그덜이 먼저 지랄이니 우리는 글먼 뭐여 신작로 내어놓응게 문뎅이가 먼저 지나간다고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혀서 원 아, 저 지랄들 헝게 될 일도 안된다고 올 농사도 진즉 떡 쪄먹고 시루 엎었어 아,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이사 바로 혀서 풍년만 들면 뭣헐 거여 안되면 안되어 걱정 잘되면 잘되어 걱정 풍년 괴민이 더 큰 괴민이여 뭣 벼불고 뭣 벼불면 뭣만 남는당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을 뙤놈이 따먹는 격이여 야, 그렇잖혀도 환장헐 일은 수두룩허고 헐일은 태산 겉고 말여 생각허면 생각헐수록 이갈리고 치떨리능게..

시읽는기쁨 2006.11.24

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 김용택

어디에다가 고개를 숙일까 아침 이슬을 털며 논길을 걸어오는 농부에게 언 땅을 뚫고 돋아나는 쇠뜨기풀에게 얼음 속에 박힌 지구의 눈 같은 개구리 알에게 길어나는 올챙이 다리에게 날마다 그 자리로 넘어가는 해와 뜨는 달과 별에게 그리고 캄캄한 밤에게 저절로 익어 툭 떨어지는 살구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둥그렇게 앉아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풀밭에 가만히 앉아 되새김하는 소에게 고기들이 왔다갔다하는 강물에게 호미를 쥔 우리 어머니의 흙 묻은 손에게 그 손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흉터에게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흰나비와 제비와 딱새에게 저무는 날 홀로 술 마시고 취한 시인에게 눈을 끝까지 짊어지고 서 있는 등 굽은 낙락장송에게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

시읽는기쁨 2006.08.01

산수국

산수국을 보면 자연의 디자인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보라색, 분홍색, 푸른색, 흰색 등의 조화도 아름답지만, 가운데 자잘한 꽃과바깥을 둘러싼꽃잎들의 배치가무척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깥에 빙 둘러서 피어있는 꽃은 가짜꽃으로 가운데 꽃의 수정을 위해 벌나비를 불러모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니 자신은 무성화인 셈이다. 인간이 아름답게 느끼는 속에는 이렇게생존을 위한 처절함이 있다.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물의 제일 임무는 후손 번식임을 알게 된다. 식물이고 동물이고 생긴 모양이나 행동의 배후에는 무조건적인 생식의 몸부림이 숨어있는 것이다. 산수국의 꽃 색깔은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수정이 끝나면 주변의 무성화는 곧 시들어서 꿀이 없음을 벌나비에게 알..

꽃들의향기 2006.07.20

그랬다지요 /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꽃이 피고 지고, 새들이 울고, 그러면서 봄날은 간다. 꽃이 피고 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새들이 우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눈을 위해 봄꽃이 화려하게 대지를 덮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귀를 위해 새들이 우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구름 모양에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 마음의 상상일 뿐, 구름은 그냥 구름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의미를 물으며 산다. 아무 대답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의미를 묻는 사람은 행복하다. 존재의 이유를, 행위의 의..

시읽는기쁨 2004.04.09

김칫독을 묻으며

오늘 아침 고향 마을은 늦게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고향집 뒤 야산의 나무들도 아침 안개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어제는 어머니, 동생네 식구들과 같이 겨울 김장을 담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터에 들러 집 뒤안에 김칫독을묻었다. .................... 눈 내리는 날, 집 뒤안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그런 그리운 집이 될 수 있을려나..... ...............................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사진속일상 200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