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7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 새해 인사 / 나태주 2024년 새해가 열렸다. 꿈 없이 꿀잠을 자고 난 첫날 아침이다.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고 설레는 소년이 되어도 본다. 그러다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글자가 환등기의 영상처럼 눈앞에서 명멸한다. '빈 손'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시인의 새해 ..

시읽는기쁨 2024.01.01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태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몇 년 전부터 크리스마스..

시읽는기쁨 2021.12.25

게으름 연습 / 나태주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

시읽는기쁨 2019.08.25

행복 /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행복 / 나태주 짧은 시 만큼이나 행복은 의외로 간단한지 모른다. 크고 거창한 게 아니다. 행복은 하늘 위 높은 곳에 있지도 않다. 소소한 일상에서 조금씩이지만 자주 만나는 만족감에서 행복은 출발한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특별함으로 다가오느냐, 거기에 행복의 마음이 있다.

시읽는기쁨 2016.06.10

독배 / 나태주

아빠는 왜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러는 거예요? 혼자만 고집부리고 그러는 거예요? 의사들이 다들 안 된다 그러고, 자료를 봐도 아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확실한데 왜 아빠 혼자만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매달리고 울고불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면 날더러 그냥 죽으란 말이냐! 그런 건 아니구요, 아빠가 하도 포기하기 못하고 매달리고 그러니까 애달파서 하는 말이에요. 아니, 어떤 딸이 그렇게 애비한테 매정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아빠, 생각해보세요.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은 아이도 있고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어요. 그걸 좀 생각해보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이렇게 말을 하고 저렇게 말을 바꾸어도 그것은 죽으라는 말밖에 다른 말이 아니지 않느냐! 어떤 딸이 ..

시읽는기쁨 2014.08.20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삶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시읽는기쁨 2010.04.02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은 자세히 볼 수록 예쁘다. 꽃에 얼굴을 갖다댈 수록 향기는 진해기고, 숨어있는 작은 아름다움도 발견하게 된다. 풀꽃은 멀리서 보아도 예쁘고, 가까이서 보면 더 예쁘다. 사람을 꽃에 비유하지만, 솔직히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가 제일 아름답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오랫동안 옆에 있으면 첫 아름다움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어떨 때는 악취가 나기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에 원인이 있기 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 품었던 내 환상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풀꽃은 인간의 환상에 대해서 조차 배반하지는 않는다. 다가갈 수록 향기가 나는 사람, 오래 옆에 있어도 물리지 않고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사람 - 야생의 풀꽃..

시읽는기쁨 2005.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