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4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

시읽는기쁨 2022.06.02

별 / 류시화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별은 내 눈물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주의자에게 가서 물었다 신비주의자는 별 따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차라리 네 안에 있는 별에나 관심을 가지라고 그 설명들을 듣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눈으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인도의 어느 노인처럼 명상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만으로 만족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

시읽는기쁨 2016.09.11

술패랭이꽃

패랭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종류는 많다. 흰패랭이, 수염패랭이, 갯패랭이, 난쟁이패랭이, 좀패랭이, 구름패랭이, 각시패랭이, 술패랭이.... 패랭이꽃과 함께 우리 산야에서 자주 만나는 꽃이 바로 이 술패랭이꽃이다. 술패랭이꽃은 패랭이보다 키도 크고, 꽃도 크다. 가장 큰 특징은 꽃잎 끝이 갈라져 있는 모양에 있다. 그래선지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든다.술패랭이라는 이름도 이런 모양에서 연유하여붙여졌을 것이다.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게 두..

꽃들의향기 2006.01.20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 가리라 한 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 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

시읽는기쁨 2005.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