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4

겨울밤 /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겨울밤 / 박용래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단 네 줄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담아냈다. 고향을 떠나온 지 긴 세월이 흘렀고,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자주 찾아오는 나이가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년의 고향 집 겨울은 따스하다. 시인의 시대로부터 그리 많은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다. 이제 그런 고향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찾아가지 못하는 고향이고, 누군가에게는 찾아가더라도 이미 사라진 고향이 되었다. 기억 속 고향과 현실의 고향은 괴리가 너무 깊다. 그런 불협화음이 우리를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닐까. 고향을..

시읽는기쁨 2024.02.17

월훈(月暈) /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드러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

시읽는기쁨 2019.02.09

구절초(2)

구절초는 가을의 향기를 담뿍 머금은 꽃이다. 쑥부쟁이, 벌개미취 등 통칭 들국화라 부르는 비슷한 꽃들이 많지만 구절초만큼 가을 분위기를 진하게 느끼게 해주는 꽃도 없다. 구절초는 처음 봉오리일 때는 연분홍이지만 나중에는 점점 흰색으로 변한다. 구절초의 흰색은 정갈하며 소박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여인의 얼굴이랄까, 인위적으로 꾸민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미인을 보는 것 같다. 예전에 비해서 구절초를 자주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손에 의해많이 퍼진 탓이리라. 그만큼 구절초는 가을꽃으로 가장 사랑을 받는 꽃이다.코스모스 보다도 훨씬 더 향토적이며 고향 냄새가 난다. 시에서 처럼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꽃이다.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

꽃들의향기 2006.10.12

울안 / 박용래

탱자울에 스치는 새 떼 기왓골에 마른 풀 놋대야에 진눈깨비 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 이웃집 아이 불러들이는 소리 해지기 전 불켠 울안 - 울안 / 박용래 내가 화가라면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내가 사진을 잘 찍는다면 이 풍경를 찍어보고 싶고, 내가 작곡가라면 이걸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 이 시에서는 새, 풀, 눈, 닭, 사람이 울안의 한 가족이다. 거기에는 주인공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특히 '불켠 울안'이라는 표현은 참 따스하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는 안식의 쉼터다. 이 작은 평화의 울안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고, 그런 마을들이 모여 평화의 나라를 만들 것이다. 현대의 비극은 이렇게 따스하게 불켜진 울안의 상실에 있지 않는가 싶다. 모든 것이 해체되어 떠난 울안은 이제 삭막하..

시읽는기쁨 2005.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