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월훈(月暈) / 박용래

샌. 2019. 2. 9. 11:53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드러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월훈(月暈) / 박용래

 

 

두 달 전에 읽은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가 생각난다. 둘은 비슷한 정조인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달에 울다>가 비감미 가득하다면, 이 시는 고적미로 애틋하다. 산골 마을에서도 외딴집, 홀로 있는 노인은 잠이 깬 채 긴 겨울밤을 지새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다중 속에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홀로 있는 충만도 있다.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고, 처마깃에 잠든 새들의 온기를 생각하는 노인은 결코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다.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있다. 도시의 독거 노인처럼 소외된 존재가 아니다.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은 장엄한 광경이다. 은은하게 번지는 품격 높은 고독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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