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실리아 6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작년 봄, 제주도에 갔을 때 '시인의 집'을 찾아갔었다. 검은 현무암이 양떼처럼 흩어져 있는 조천 바닷가에 시인의 집은 낮고 겸손하게 앉아 있었다. 덜컥 새집을 짓는 게 아니라 백 년 ..

시읽는기쁨 2020.02.24

진경 / 손세실리아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 진경(珍景) / 손세실리아 시집 를 폈을 때 맨 처음에 만난 이 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이 시에 묘사된 노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무엇엔가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칼에 베인 것 갈기도 한 통증이 생겼다. 백화사 굽잇길의 노파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생명(生命)을 직역하면 '살아내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나 고단한 인생길일지라도 한 아픔이 다른 아픔을 보듬고 함께 걸어갈 때 꽃이 되고 진경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애잔한 생명붙..

시읽는기쁨 2019.11.22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셀프 염색을 지켜보던 남편이 세월에 순응하는 것도 지천명의 덕목 아니겠냐 길래 산수국과 동박새와 늙은 등대와 길고양이 랭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대꾸하고서 서릿발 내린 머리카락이 물들기를 기다리다 별안간 목울대가 뜨거워져 엊그제 엄마에게 다녀왔는데 몰라보더라고 자식이 둘도 아닌 딱 하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무래도 반백 때문인 것 같다고 실토하며 어깨 들먹이는 -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손세실리아 시인이 운영하는 북카페 '시인의 집'에 들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가에 앉아 조천 해변을 바라보고, 탁자에 놓인 책도 뒤적이고, 시인과 작은 대화도 나누었다. 따스한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시인의 집' 입구에 이 시가 적혀 있다. 시인의 최근작이라고 한다. 찬찬히 읽어 보니 울컥하게 된다. ..

시읽는기쁨 2019.03.08

탄식 / 손세실리아

사경을 헤맨 지 보름 만에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옮기시던 날 효도한답시고 특실로 모셨다 - 아따 좋다이 근디 겁나게 비쌀 턴디 - 돈 생각 말고 푹 쉬어 - 후딱 짐 싸라 일반실로 내려가게 - 근천 그만 떨어 누가 엄마한테 돈 내래? 뜬눈으로 간병한 사람은 안중에도 없지? 늙으면 남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만 안다더니 틀린 말 아니네 설득하고 대꾸하고 통사정하다가 풀죽은 넋두리에 벼락 맞은 듯 기겁해 황급히 입원 도구를 꾸렸다 - 아가 독방은 고독해서 못써야 통로 끝집 해남떡이 베란다서 떨어진 것도 다 그 때문 아니것냐 - 탄식 / 손세실리아 오랜만에 시집을 한 권 샀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이다. 손 시인의 시는 참 쉽다. 술술 읽힌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작은 조약돌처럼 시들이 예쁘다. 이 시 '탄식'에서..

시읽는기쁨 2016.07.27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지난 4.11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을 색깔로 표시한 지도다. 부끄러운 우리의 현주소다. 내가 선거권을 가지고 투표를 시작한 이래 동쪽 지역은 언제나 이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할 세월이 흘렀는데도 똑같다. 패거리 의리도 이만하면 알아줄 만하다. 그나마 서쪽은 알록달록 물이 들고 있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뭘까를 생각한다. 나도 고향이 동쪽이지만 고향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물론이나 정치적 냉소주의는 핑계다. 단순한 지역색 이상의 무엇이 인간을 좌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인간은 떼로 움직이게 되면 멍청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모른다. 지역, 파벌, 민족으로 갈라져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역사는 수도 없이 많다. 선거만 끝나면 뒤를 덜 보고 나온 것처럼..

길위의단상 2012.04.24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 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까지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없다. 아루래도 엄살이 심했다 -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겨울에 호수는 제 몸을 얼려 동안거에 들어갔다. 세상과 소통하는 구멍 다 틀어막고 묵언정진 중이시다. 둘레의 나무들 또한 알몸 드러내고 고행을 하고 있다. 부끄럽다....

시읽는기쁨 2008.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