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샌. 2019. 3. 8. 10:33

셀프 염색을 지켜보던 남편이

세월에 순응하는 것도

지천명의 덕목 아니겠냐 길래

산수국과 동박새와

늙은 등대와 길고양이 랭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대꾸하고서

서릿발 내린 머리카락이

물들기를 기다리다

별안간 목울대가 뜨거워져

엊그제 엄마에게 다녀왔는데

몰라보더라고

자식이 둘도 아닌 딱 하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무래도

반백 때문인 것 같다고

실토하며 어깨 들먹이는

 

-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손세실리아 시인이 운영하는 북카페 '시인의 집'에 들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가에 앉아 조천 해변을 바라보고, 탁자에 놓인 책도 뒤적이고, 시인과 작은 대화도 나누었다. 따스한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시인의 집' 입구에 이 시가 적혀 있다. 시인의 최근작이라고 한다. 찬찬히 읽어 보니 울컥하게 된다. 애꿎은 반백 핑계를 대며 물들이는 건, 슬픔과 연민! 또한 생각한다. 야속한 세월을 버텨낼 힘 역시, 슬픔과 연민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고.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매(盆梅) / 임영  (0) 2019.03.27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0) 2019.03.17
동방의 등불 / 타고르  (0) 2019.03.01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 장석남  (0) 2019.02.25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0) 2019.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