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 진경(珍景) / 손세실리아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를 폈을 때 맨 처음에 만난 이 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이 시에 묘사된 노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무엇엔가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칼에 베인 것 갈기도 한 통증이 생겼다. 백화사 굽잇길의 노파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생명(生命)을 직역하면 '살아내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나 고단한 인생길일지라도 한 아픔이 다른 아픔을 보듬고 함께 걸어갈 때 꽃이 되고 진경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애잔한 생명붙이들 사이의 아름다우면서 처연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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