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 김기택

샌. 2019. 11. 16. 20:46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저렇게 달게 자고 나니, 하룻밤에 이 세상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눈알들은 아침을 보고 잠시 휘둥그레지고 어리둥절해진다. 전생이 기억날 듯 말 듯 모든 것이 낯선 모양이다. 그러다가 아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금방 친해져 온몸으로 그 즐거움을 참지 못한다.

 

-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 김기택

 

 

유치원에 다니는 손주가 가끔 집에 와서 잔다. 할머니 곁에서 자고 싶다고 조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별로지만 할머니와 같이 있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손주가 잠자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 동화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드는데, 시에서 표현한 대로 무엇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한 번 잠이 들면 꼼짝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잔다. 그리고 맞는 아침은 다시 태어난 하루의 시작이다.

 

반면에 나는 어떤가. 손주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는 한두 시간 안에 다시 깬다. 깊이 잠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쉽게 눈이 떠진다. 다시 잠들기 위해서는 라디오를 틀었다가 끄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한다.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수면제 도움을 받는다. 늙으면 잠도 도망간다. 억지로 자는 잠은 나쁜 꿈에 시달리기 일쑤다. 왜 자꾸 팔푼이 짓을 하고, 사람들과 다투는지 모를 일이다. 아침에 일어난들 개운하지 않다.

 

아기의 작은 몸짓, 미소, 잠 등 모든 것이 우리를 경탄케 한다. 생명의 원초적 기운이 어떤 것인지 아기를 통해 우리 앞에 드러나 보인다. 생명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그 시기가 인생의 절정기가 아닐까 싶다. 그 이후는 삶이 아무리 화려한들 실낙원 속 몸부림에 불과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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