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1

뜬 세상에 살기에

김승옥 작가의 최근 글을 만나는 기대감에 책을 열었으나 1970년대에 나온 수필집이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작가가 20대와 30대에 쓴 글인데 책 제목에 낚인 감도 있다. '뜬 세상에 살기에'라는 제목만 보고 노년에 들어 쓴 것이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은 작가의 청년기 삶과 생각을 드러내 보여준다. 소설가로 등단한 계기,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에 대한 단상, 다양한 세평들이 들어 있다. 특히 60년대 초반의 대학 생활은 흥미로웠다. 동인지 를 만드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학창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활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이 수필집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의 분위기가 작가를 그대로 닮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한 글에서 을 쓰게 된..

읽고본느낌 2023.12.02

그늘에 대하여

일본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의 산문집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전통미에 경도해 이를 글로 아름답게 살려내는 새로운 경지를 연 작가다. 여기에 실린 '그늘에 대하여'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그늘에 대하여'를 비롯해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흔히 전통미를 말할 때 형태와 맵시에 주목하지만 작가는 일본 건축에 스민 그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늘에 대하여'는 빛을 다루는 일본인의 섬세함을 일본적 감성으로 잘 그려내 보여준다.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이다. '음예(陰翳)'는 생소한 용어인데 '그늘인 듯한데 그늘이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라고 한..

읽고본느낌 2023.11.05

다정소감

책 제목인 '다정소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다정소감(多情小感)이라고 짐작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책 내용도 내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이런 단어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책 말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다정소감(多情所感)이다. 내 엉뚱한 추측에 실소를 했다. 은 김혼비 작가의 산문집이다. 글에서는 글을 쓴 사람이 보인다. 지은이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도 해 본다. 김혼비 작가는 따스한 마음을 가졌으면서 다이내믹한 분 같다. 정과 동을 겸비한, 그래서 만나면 무척 재미있을 분으로 느껴졌다. 풋풋한 햇사과를 먹는 것..

읽고본느낌 2022.09.30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와 '가난'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가난과 단순한 삶을 예찬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짚었다. 는 가난해도 멋있고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MZ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소비하는 세대임을 당당하게 말한다. 부모 세대처럼 근검 절약만이 미덕이 아니다. 가난하지만 부유한 생활을 즐기고, 통장 잔고가 바닥을 쳐도 눈앞의 케이크를 황홀하게 탐닉하는 것이 이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돈 버는 방법은 잘 몰라도 돈 쓰는 방법 하나는 귀신 같이 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카르페 디엠'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가난할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걸 이미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는 수밖에 ..

읽고본느낌 2022.07.24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80세 넘은 작가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80세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이 책은 미국의 SF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에세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올린 글을 모은 책이다. 이 분은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블로그는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자기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낯선 사람들과 댓글로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든여섯에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마라구 작가를 보고 생각을 바꿔 블로그를 하게 되었다. 작가는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으로 자유로움을 든다. 사마라구처럼 독자들과 소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 블로그 글쓰기다. 지난번 도널도 홀의 수필처럼 어슐러의 글에서도 노년의 지혜와..

읽고본느낌 2022.06.25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미국의 시인인 도널드 홀(Donald Hall)이 여든 이후에 쓴 에세이집이다.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지만 나이에서 오는 노숙한 시인의 풍모가 글에서 느껴진다. 글은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 재미있다.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의 여유가 부럽다. 지은이는 12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70년 넘게 40권의 책을 출간했고 2006년에는 미국 계관시인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국가예술훈장을 받았다. 상을 받게 된 사연이며 에피소드가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시인은 2018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이 책에 실린 글은 그가 말년에 쓴 에세이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펜을 놓지 않았다. 책 제목으로 쓰인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은 노년에 든 누구나 느끼는 감..

읽고본느낌 2022.06.19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탁현민 씨가 쓴 여행 수상집이다. 글을 쓴 시점이 문재인이 대선에 패배했던 직후인 2013년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일한 탁현민 씨는 패배의 충격으로 파리에서 석 달간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한다. 이때의 감상을 글로 적어서 책으로 냈다. 탁현민 씨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된 후 이름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공연 연출가로 중요한 대통령 행사를 지휘했다. 대표적인 게 남북 정상이 만난 판문점 회동이다. 고식적인 형식을 탈피한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금방 남북 화해가 이루어질 듯 가슴을 뛰게 했으나 지나고 보니 결과는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당시 야권에서 보여주기식 쇼는 그만두라고 했는데 일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에는 선거 결과에 상심한 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 담겨 있다. 나도 그때 허탈한 기분을 달..

읽고본느낌 2022.04.02

타인에 대한 섬세함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여자 둘이 들어온다. 바로 자전거로 직행하더니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러닝머신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다. 헬스장을 자기네 집 거실로 착각하는 것 같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주변 사람이 얼마나 불쾌하게 여길지는 안중에도 없다. 헬스장 벽에는 타인을 위해 잡담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다. 옆에 누가 있건 말건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은 너무 자주 본다. 층간소음 문제도 이웃에 대한 배려심의 부족에서 생기는 게 아닐까. 우리는 너무 무례하고 투박하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남긴 상처의 무게를 잴 ..

참살이의꿈 2020.02.03

이양하 수필

우울한 대한민국에서 도피하고파 이양하 수필집을 꺼냈다. 선생의 수필은 진흙탕 현실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년 시절도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 만난 '신록 예찬' '페이터의 산문'은 50년이 된 지금도 명료하다. 어려운 한자가 많이 나왔지만 고전적인 문체는 사람을 끌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나이나 분위기에 따라 같은 글이라도 느낌이 다르다. 고등학생 때 만난 선생의 수필에는 봄의 설렘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런 느낌을 맛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다면, 지금은 내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 같다. 그러나 선생의 수필도 지금의 내 우울한 마음을 온전히 위로해주지 못한다. 너무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이다. '페이터의 ..

읽고본느낌 2016.12.24

관촌수필

오래전에 읽다가 만 소설인데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게 완독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소설 읽기가 힘들었는가 보다. 무엇이건 때가 무르익어야 자연스레 된다. 에는 고향의 정경과 인정이 토속어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체에서도 고전적인 향취가 난다. 사라져 간 고향과 사람들을 이만큼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도 만나기 어렵다.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특히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작품의 맛을 더한다.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어휘를 구사하자면 많은 공부와 노력이 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의 집은 한산 이씨의 잘 나가는 양반이었다. 증조부는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집은 풍비박산이 났고, 작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읽고본느낌 2015.01.12

계림수필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일기 형식의 수필집이다. 2009년 4월 14일부터 11월 9일까지 일상의 단상이 실려 있다. 짧은 경구가 많이 나오니 아포리즘 수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특이한 점은 내용의 반 이상이 닭에 관한 얘기다. 이라는 제목처럼 집에서 기르는 닭을 보고 배운 삶의 지혜를 적고 있다. 세밀한 관찰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선생은 닭이 개처럼 인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 본연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준다고 말한다. 자연의 리듬을 존중하며 천리(天理)에 따라 사는 닭의 모습에는 천지지심(天地之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닭을 키우면서 천지의 이법(理法)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주변의 모든 것이 스승이 된다는 말이 맞다. 선생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 역시 ..

읽고본느낌 201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