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5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히말라야와 산티아고를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과는 달라졌다. 전에는 마음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몸의 문제다. 12년 전에 찍었던 히말라야 사진을 보면서 다시 그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바로 지금 내 심정이다. 이런 경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종내는 슬퍼할 수조차 없는 때가 찾아올 것이다. 늙음이든, 병이든, 집안의 변고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찌할 수..

시읽는기쁨 2021.04.24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

해가 바뀌면서 누구나 똑같이 한 살이 보태진다. 찰나의 어긋남도 없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한숨 쉬며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을 충실히 못 살고 있다는 반증밖에 안 되는 짓이다. 강남에 사는 누구는 아파트값이 껑충 뛰었고, 지방에 사는 아무개는 도리어 값이 내려갔다. 같은 서울에서도 편차가 크다. 배가 아픈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나이 먹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되겠는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은 한 살이 늘어나는데, 깡촌에 산다고 열 살이나 더 먹는다면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사 중에서 흐르는 세월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이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나 미래에는 ..

길위의단상 2020.01.05

세월의 강물이야 어떻게 흐르든

세월이 너무 빠르다. 퇴직 전에는 하루 보내기가 지겨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서 빨리 저녁이 왔으면 싶었다. 그만큼 낮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하루는 느릿느릿한데 일 년은 금방 지나간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도 순식간이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이고, 점심을 먹으면 어느새 저녁이고 밤이다. 일 없으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나는 반문한다. 지루해져나 봤으면 좋겠다고. 구멍 뚫린 풍선에서 바람 빠져 나가듯 시간이 도망가니 여생의 무게가 깃털보다도 가볍게 느껴진다. 힘이 빠지니 스쳐가는 시간 쫓아가기도 벅차구나. 여윈 마음에 숨결만 가쁘게 허덕거린다. 그러나 샌, 빠른 세월에 쫓겨 너마저 조급할 필요는 없는 거지. 발동이 걸린 세월이야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해. 너는 흐르는 ..

참살이의꿈 2011.08.08

그때 이랬다면

세상사는 뒤엉킨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는 온 우주가 관계한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우연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필연이라고 한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 지구별에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나게 된 것도 기적 같은 사건들이 겹쳐서였다. 그중 하나만 없었어도 우리 존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마치 벽돌 하나가 빠지면 전체 건물이 붕괴되는 경우와 같다. 우리는 인과의 그물망이라는 시공간에서 존재하고 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그런 장면이 있다. 한 남자가 늦잠을 잔다. 그가 급히 택시를 타는 바람에 한 여자가 택시를 놓치고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다음 택시를 탄다. 길을 가던 택시가 화물차에 막혀 신호를 기다리고, 이때 연습실에서 나온 데이시의 신발끈이 풀린다..

읽고본느낌 2009.04.03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 더딘 사랑 / 이정록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역시 다르다. 달의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윙크라고 보다니. 그렇다면 달의 윙크에 대한 지구의 대답은 무엇일까? 연모의 감정이 너무 뜨거워 화산으로 터져나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조바심치고 수선스러운 것은 지구상의 작은 인간들밖에 없는 것 같다.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리는 더딘 사랑은 속전속결의 인간들 사랑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우리가 하루살이의 바쁜 날개짓을 바라보듯이.

시읽는기쁨 2007.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