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15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 신경림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서 산다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시읽는기쁨 2024.05.25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지은이인 정규웅 작가는 1970년대에 중앙일보 문학 담당 기자로 있으면서 많은 문인들을 취재하고 교유를 가졌다. 이 책은 그 시절 문인들에 얽힌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혹독한 계절이었다. 그 시대는 1970년의 '정인숙 피살 사건'과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으로 시작되어 1979년 박정희 피살로 끝을 맺었다. 문학계도 민중문학,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반체제문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시대 현실을 외면하고 정권에 아부하거나 순수문학을 고집하는 부류도 있었다. 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내 기억에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차지하려고 김동리와 조연현 간에 벌어진 볼썽사나운 싸움도 그중 하나다. 당시에는..

읽고본느낌 2023.03.08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작가가 북한에서의 시인 백석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본명인 백기행으로 나온다. 해방 뒤 북한에 남은 백석은 전쟁을 거치고 숙청의 파도에서 살아남아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일곱 해'란 백석이 동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삼수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추방되어 완전히 절필하게 된 1962년까지를 말한다. 백석의 북한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므로 은 많은 부분이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져 있다. 전쟁 뒤 북쪽은 김일성의 유일사상만 통하던 통제된 사회였다. 문학도 혁명의 도구일 뿐이어서 백석 같이 감성이 풍부한 순수시를 썼다가는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백석은 옛 시를 잊고 혁명과 증오를 부추기는 동시를 써야 했다. 백석이 그때 쓴 동시를 보면 ..

읽고본느낌 2021.06.01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시를 쓰던 어느 날 거짓말 한 번 있었습니다. 밥을 먹어야 하겠기에 돈을 벌러 나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어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놓고 나왔으니 이천 원만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 돈 빌려 집에 오는 길에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날따라 비조차 내렸습니다. 우산 없이 집으로 오는 길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 내 안에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하지만 마음이 비어 시를 쓸 수 없게 된다면 더욱 슬픈 일이 될 거야 - 이 말 한마디 하고 내게 웃었습니다. -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조기영, 고민정 커플은 가난한 시인과 여자 아나운서의 결혼으로 화제가 되었다. 시인은 가난했고, 희귀병을 앓고 있었으며, 열한 살이나 연상이..

시읽는기쁨 2020.03.17

김수영의 연인

올해가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된다. 이 책은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 여사가 쓴 에세이로 김수영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시인을 처음 만나 결혼하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별하기까지 두 분의 삶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여사는 1927년생으로 용인에서 시인의 생전 집필실을 재현해두고 홀로 살고 있다. 이라는 책 제목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두 사람은 부부라기보다는 문학 동지이자 연인으로 살았다. 둘은 보통의 부부관계 이상의 공통된 이상을 갖고 있었다. 시인이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사도 여느 여자와는 다르다. 시인이 '아방가드르'한 여자라고 불렀다는데, 여사도 시인 못지않게 파격적인 면모를 보인다. 여사는 시인을 진명여고 2학년 때 만났다고 한다. 연애 ..

읽고본느낌 2018.10.23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

시읽는기쁨 2018.02.09

솔개 /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 솔개 / 김종길 아흔이 넘으신 김종길 시인은 여전히 시를 창작하고 계신다.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매우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며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가 없는 것 같다. '병 없이 앓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시인이 지향하는 시세계..

시읽는기쁨 2016.01.18

시인 동주

안소영 작가가 시인 윤동주의 삶을 소설로 구성한 책이다. 스물여덟에 이국의 감옥에서 숨진 시인의 슬픈 일생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1938년 용정을 떠나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해서부터 일본 유학 중 반체제범으로 2년 형을 살다가 1945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대순으로 보여준다. 시대의 희생양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던 윤동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인이 살다간 시대는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했다. 나라를 잃고 모국어로 시를 쓰지도 못하는 절망 속에서 시대의 아픔은 곧 시인의 아픔이었다. 시류에 영합했다면 자기 몸을 보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순수한 영혼은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항하는 행동파는 아니었다. 어쩌면 관조적 자세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았..

읽고본느낌 2015.05.30

백석 평전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다. 안 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백석의 생애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시인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가 백석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백석이 남긴 작품을 중심으로 되살린 건 의미 있다. 책이 쉽게 재미있게 읽혀 좋다. 백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던 백석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되었다. 결벽증이 있는 모던 보이 백석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화기는 남 손이 닿았다고 손수건으로 싸서 잡고, 악수한 뒤에는 비누로 씻을 정도로 깔끔했다. 남이 만진 물건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멋을 부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양..

읽고본느낌 2015.01.18

시인 공화국 /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

시읽는기쁨 2014.11.26

안도현 시인을 가까이서

내가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이 우리 동네에 찾아왔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시인을 초청해서 시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40명 정도가 모인 조촐한 모임이었는데, 이름난 시인이 동네 단위의 행사에까지 참석해 준 게 무척 고마웠다. 시와 글로 접해서 느낀 대로 조용하며 차분한 성격의 안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 된 출발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원래는 화가가 될 생각이었는데 국어 선생님에게 혼이 난 후 좋은 시를 써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문예반에 들어간 게 시인이 되는 계기였다고 해서 모두를 미소 짓게 했다. 시를 쓰는 데 제일 경계할 일이 진부한 표현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질문을 한 사람에게 시집 한 권씩을 선물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을 ..

사진속일상 2014.11.01

신동문 평전

신동문(辛東門, 1927~1993) 시인의 생애와 삶이 궁금해서 찾아 읽은 책이다. 10여 년 전 밤골로 들어갈 때 시인의 '내 노동으로'를 좋아해서 자주 읊었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시는 당시의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도시에서의 껍데기 삶을 미련없이 버린 뒤 농촌에서의 육체노동을 나도 꿈꾸고 있었다. 시인과 다른 건 나는 어설프게 제대로 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책에 소개된 시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본명은 건호(建浩)이고 동문은 필명이다. 충북 청원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 청주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결핵을 앓아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

읽고본느낌 2014.07.01

아흔여섯의 나 / 시바타 도요

시바타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도우미의 물음에 난처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잘못됐다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웃을 뿐이었습니다 - 아흔여섯의 나 / 시바타 도요 시바타 도요, 1911년에 태어났으니 백 세를 넘었다. 아흔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해서 산케이 신문의 '아침의 시'에 입선되었다. 그리고 시집까지 내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에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백 세가 넘어서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건보통 축복이 아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싱그러운 감성이 유지된다는 게 기적처럼 보인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스한 관심이 없으면 시는 나오지 않는다. TV에도 가끔 장수 노인이 나오지만 아흔이 넘은 나이에 시를 쓴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

시읽는기쁨 2011.11.06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은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어느 자리에선가 미당 얘기가 나왔을 때, 국어 선생님이신 S 형이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S 형은 미..

시읽는기쁨 2010.03.25

시인은 / 이한직

한 눈을 가리고 세상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樓)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 시인은 / 이한직 시처럼, 시인처럼 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시인의 삶이란 첫째,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그는 구슬을 보고도 돌아설 줄 안다. 고로 시인은 가난하다. 그래도 시인의 마음은 너그럽고 고요하다. 빙그레 웃을 줄 아는 여유가 있다. 둘째는, 순수한 감성을 가져야 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한 눈을 감은 대신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선각자적 예지를 지녔다. 시인이 늘 자신이 쓴 시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

시읽는기쁨 2006.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