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일곱 해의 마지막

샌. 2021. 6. 1. 11:03

김연수 작가가 북한에서의 시인 백석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본명인 백기행으로 나온다. 해방 뒤 북한에 남은 백석은 전쟁을 거치고 숙청의 파도에서 살아남아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일곱 해'란 백석이 동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삼수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추방되어 완전히 절필하게 된 1962년까지를 말한다.

 

백석의 북한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므로 <일곱 해의 마지막>은 많은 부분이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져 있다. 전쟁 뒤 북쪽은 김일성의 유일사상만 통하던 통제된 사회였다. 문학도 혁명의 도구일 뿐이어서 백석 같이 감성이 풍부한 순수시를 썼다가는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백석은 옛 시를 잊고 혁명과 증오를 부추기는 동시를 써야 했다. 백석이 그때 쓴 동시를 보면 시인의 가련한 몸부림으로 보여 한숨이 나온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체제에 짖눌려 신음하는 한 시인을 안쓰러운 눈길로 보여준다.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라는 친구 준의 목소리가 바로 시인이 다짐하는 바일 것이다. 시대에 좌절하고 운명에 불행해지더라도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다. 시인은 시대의 어둠에 무너지지 않고 버텨낸다.

 

소설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나온다. 백석이 시 원고를 넘겨준 러시아 시인 벨라, 친구 준과 현, 시인과 비슷한 처지가 된 상허 이태준,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귀국했다가 결국 자결하는 옥심, 삼수에서 백석을 알아보고 따르는 여선생 서희 등이다. 인간의 고결한 정신은 누구도 제맘대로 짓밟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백석이 과거를 회고하는 장면이 몇 있는데 그중에 통영의 한 소녀를 사랑한 사연도 나온다. 소설에서는 천희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백석은 천희를 만나기 위해 통영에 내려갔고 그녀를 위한 시도 썼다. 그런데 자야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야가 백석의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삼수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에 도착한 백석은 자신이 쓴 시를 노트에 다시 적은 뒤 난로에 불태워버린다. 한 편의 시를 쓰고 쭉 읽은 뒤,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고 그 불꽃을 바라보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가 시와 이별하는 의식이 슬프다. 

 

백석이 북한에 남음으로써 우리는 아까운 시인 하나를 잃은 것일까. 만약 백석이 남한으로 내려왔다면 어땠을까. 나이로나 작품의 질로나 당시는 백석 문학 정신의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절창을 우리는 만날 수 있었을까. 두고두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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