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6

무덤덤에 대하여

노인이 된다는 건 감정이 무뎌지는 일이다. 희로애락의 진폭이 점점 줄어든다. 젊은 시절의 가슴 설렘은 멀리 사라져 간다. 크게 웃을 일도 뜸해진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할지 모른다. 감정의 요동이 적으니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게 가능해진다. 웃을 일이 적다지만, 애통할 일도 줄어든다. 잃으면 얻는 게 있다. 청춘에는 약동하는 젊음이 있지만, 온갖 번뇌와 열정에 시달려야 한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가만두지 않는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반면에 노년은 따스한 온기를 품은 화로와 같다. 사람들은 화로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의 얘기를 속삭이듯 나눈다. 고된 노동 뒤 안식의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이 좋다. 무..

참살이의꿈 2018.12.31

울릉도 / 유치환

동쪽 먼 심해선(沈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만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沈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 울릉도 / 유치환 아직 못 가본 섬들이 많다. 울릉도, 홍도, 흑산도, 백도, 청산도 등등. 외국으로만 눈을 돌릴 게 아니라 내 나라도 찾아가봐..

시읽는기쁨 2012.10.03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 유치환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다. 이에 육조 혜능선사가 말했다. "바람이 윰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움직인다는 말입니까?"혜능이 답했다. "두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시인이 본 깃발이나 혜능선사가 본 깃발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펄럭이는 깃발에서 마음을 읽은 것이..

시읽는기쁨 2009.05.20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 유치환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네 종류로 ..

시읽는기쁨 2008.01.08

생명의 서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生命)의 서(書) / 유치환 젊었을 때 이 시의 강렬한 시어들을 무척 좋아했다. '독한 회의' '작열' '영겁..

시읽는기쁨 2007.11.15

그리움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 유치환 '그리움'은 허기진 땅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그 무엇을 그리워 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 하고, 가고 싶은 저 피안의 땅을 그리워 한다. 모든 그리움의 대상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이다. 그리움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동시에 그리움은 한없이 아프기도 하다. 욕망이 충족되어도 그리움은 남는다. 올해는 나에게 그리움의 한 해가 될 것 같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누구든, 마음 속으로 아름답게 아프게 그리워 해야 할 것 같다.

시읽는기쁨 200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