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철 4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살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듯하다. 오히려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아니오, 라고 답하라. 계단을 내려가면 ..

시읽는기쁨 2014.03.20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유리도 귀했던 때 창호지 문에 조그맣게 유리 한 조각 발라 붙이고 인기척이 나면 그 유리 통해 밖을 내다보았지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 차라리 상상력이 더 길었던 때 여백이 많았던 때 문풍지 우는 바람이 아름다웠던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던 때 -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날씨가 차가워지니 고향 생각, 어릴 적 생각이 자주 난다. 추웠고, 먹을 것 부족했고, 모든 게 궁핍했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벽난로를 피우고 거실 한쪽 벽면을 유리창으로 환하게 만들어도, 그 옛날 창호지 유리 한 조각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호롱불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밤이었다. 추워서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누우면 싸락눈이 사각거리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면 온통 어둠..

시읽는기쁨 2013.11.20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 윤재철

바퀴는 몰라 지금 산수유가 피었는지 북쪽 산기슭 진달래가 피었는지 뒤울안 회나무 가지 휘파람새가 울다 가는지 바퀴는 몰라 저 들판 노란 꾀꼬리가 왜 급히 날아가는지 바퀴는 모른다네 내가 우는지 마는지 누구를 어떻게 그리워하는지 마는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고독한지 바퀴는 모른다네 바퀴는 몰라 하루 일 마치고 해질녘 막걸리 한 잔에 붉게 취해 돌아오는 원둑길 풀밭 다 먹은 점심 도시락 가방 베개 하여 시인도 눕고 선생도 눕고 추장도 누워 노을 지는 하늘에 검붉게 물든 새털구름 먼 허공에 눈길 던지며 입에는 삘기 하나 뽑아 물었을까 빙글빙글 토끼풀 하나 돌리고 있을까 하루해가 지는 저수지 길을 바퀴는 몰라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 -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

시읽는기쁨 2013.09.25

아버지 / 윤재철

뇌졸증으로 쓰러져 의식이 점차 혼미해지면서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거기서 아버지는 몸부림치며 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링거 주삿바늘이 뽑히고 오줌주머니가 떨어졌다 남자 보조원이 아버지의 사지를 침대 네 귀퉁이에 묶어버렸다 나중에는 의식이 없어 아무 말도 못하면서 짐승처럼 몸부림만 쳤다 팔목이며 발목이 벗겨지도록 집으로 가자고 고향도 아니었다 집이나마나 창신동 골목길 셋방이었다 - 아버지 / 윤재철 작년 가을, 장인 어른이 돌아가셨다. 병원을 오가며 암 치료를 받으시다가 생의 마지막 날들은 집에서 보내셨다. 당신의 소원대로 당신의 방, 당신의 침대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셨다. 임종을 지켜본 모두들 평안한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만약 병원에 있었더라면 목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꽂..

시읽는기쁨 200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