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6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이문재

입학식이 따로 없고 자기 생일 아침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덟 살짜리와 열두 살 짜기가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나라, 교과서가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라며, 아이들의 미래를 돌려달라며, 등교를 거부하는 여학생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할머니와 직장인과 미혼모 여학생이 한집에 사는 나라 등록금을 나라에서 다 대주는 나라 달리기 시합 때 아이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골인하는 나라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나라 연간 입국 관광객 수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나라 군대 없는 나라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키우지도 않고 수입하지도 않는 나라 에너지를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나라 식량 자급을 위해 농업, 농촌, 농민을 존중하는 나라 새..

시읽는기쁨 2023.04.06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이문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이문재 자유와 고독, 어떻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선 말 같다. 그렇다면 둘을 잘 조화시키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아도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고독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가 아니..

시읽는기쁨 2022.03.05

큰 꽃 / 이문재

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 큰 꽃 / 이문재 지난가을 등산할 때 Y가 산길 따라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고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눈에 익은 나무가 아..

시읽는기쁨 2015.12.18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

시읽는기쁨 2014.07.25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이문재 시인의 산문집이다. 제목이 특이해서 서가에서 뽑게 되었다. 바쁜 것이 게으르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바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다. 바쁜 세상에 맞추어 대부분 그렇게 산다. 바빠서 나를 돌아보고, 둘러보고, 내다볼 수가 없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 비슷한 무엇이 정신없이 사는 것이다.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게으른 것이고, 이런 게으름은 부도덕하고 반인간적이다. 에 나오는 글은 산업 자본주의 문명의 반인간성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시인의 생태론과 자연주의에 대한 신념은 거의 신앙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반성도 곳곳에 보인다. 글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 시인의 담백한 마..

읽고본느낌 2014.01.13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인생은 고단하고 슬프다. 겉으로는 웃음으로 가리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외롭고 아픈 존재들이다.속을 감추려 우리는 양파처럼 수많은 껍질로 내면을 감싸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

시읽는기쁨 2006.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