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6

나도 보험에 들었다 / 이상국

좌회전 금지 구역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택시기사가 핏대를 세우며 덤벼 들었지만 나도 보험에 들었다 문짝이 찌그러진 택시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조수석에 탔다가 이마를 다친 남자에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이나 죽음이 극적일수록 보험금은 높아질 것이고 아내는 기왕이면 좀더 큰 걸 들지 않은 걸 후회하며 그걸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구를 바꾸며 이 세계와 연대할 것이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 나도 보험에 들었다/ 이상국 아내가 공기 청정기를 사 왔다.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휴대폰으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는 일이 아내의 일과가 된 지 오래였다. 빨간색이 파란색으로 바뀌는 걸 보..

시읽는기쁨 2017.03.25

커피 기도 / 이상국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속으로 그러다가 기도를 마친 모녀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서야 나도 커피를 마셨다 - 커피 기도 / 이상국 천주교에 입교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성호경을 긋고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배웠다. 배운 대로 온전히 실천하던 때였다. 청계산에 등산을 갔는데 여름이라 목이 탔다. 마침 산정 가까이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보통 하던 대로 돈을 내다가 흠칫했다. 막걸릿잔을 들고 성호경을 긋는 게 너무 이상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까, 결국은 ..

시읽는기쁨 2016.06.22

큰일이다 / 이상국

차 문을 열어두었더니 밤 사이에 뒷좌석과 앞좌석 사이에 거미가 집을 지었다 그러면 거미의 밥을 위하여 나비나 파리도 들어올 수 있게 계속 문을 열어두어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나와 미국의 무역센터 빌딩이 쓰러지는 걸 바라보며 어디서 많이 본 비디오 게임 같다거나 북조선이 핵실험을 해도 애써 눈도 꿈쩍하지 않는 이 나는 다르다 그러나 사무실 유리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이름 모를 새의 주검을 냇가에 묻어 주고 한나절 소주로 음복을 하면서도 시장바닥을 배로 밀고가는 사람의 돈통에 동전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또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이런 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언제부턴가 내가 모든 저들일지 모른다는 그런 되지도 않은 생각 때문에 같은 나와 다른 나는 날마다 싸운다 오늘도 시청 민원실에 들어가..

시읽는기쁨 2016.01.03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쫄딱 / 이상국 포터 트럭에 싣고 온 짐을 컨테이너에 넣을 때 마음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저 집은 망해서 온 모양이야." 나도 경험한 일이다. 사람들의 연민 어린 눈빛이 그런 거였구나. 돈 많다고 거들먹거려서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먹물 티도 마찬가지다. 도..

시읽는기쁨 2015.09.24

선림원지에 가서 / 이상국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 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 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 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이 지천인데 경전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

시읽는기쁨 2014.10.17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마음을 확 당기는 시가 있다. 시를 만나는 건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마음을 끄는 사람이 있듯이 시도 그렇다. 이럴 때는 서로의 주파수가 맞았다고 말한다. 시와 내 정서의 파장이 공명을 일으키는 게 시가 주는 ..

시읽는기쁨 2014.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