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5

밥 / 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숫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시읽는기쁨 2017.10.25

별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 별 / 정진규 지금 슬퍼하는 당신, 별을 볼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합니다. 지금 아파하는 당신, 별을 낳을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합니다. 어둠은 다가오는 새벽 때문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로 환하답니다. 지금 웃고 즐거워하는 당신, 당신의 가슴에서는여전히 별들이 빛나고 있나요? 스스로 너무 밝으면 별들은 사라진답니다. 지금 대낮인 사람은 어둡습니다.

시읽는기쁨 2010.12.13

이별 / 정진규

그 여자와 작별하면서 나는 그 여자에게 이제 어머니로 돌아가라고 말한 바 있다 너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그게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이별 / 정진규 며칠 전 초등학교 동기들의 송년회가있었다. 송년회라고 세 명의 여자 동기들도 함께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추억으로 인하여 서먹했던 자리는 금방 난로처럼 따뜻해졌다. "나, 오늘 늦어도 돼. 남편한테 허락 받았다구." 단발머리 소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고, 어느새 손자를 보는 나이까지 되었다. 눈가의 주름과 흰머리를 가릴 수 없듯,..

시읽는기쁨 2009.12.09

마른 들깻단 / 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늦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단,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미끄럽다 - 마른 들깻단 / 정진규 고소한 깨보다 들판의마른 들깻단에 더 시선이 가는 나이가 되었다. 젊음의 패기와 욕망도 좋지만 노년의 텅 비워지고 가벼워진 마른 자리도 아름답다. 인생에는 이루어야 할 때가 있고, 비우고 내보내야 할 ..

시읽는기쁨 2008.12.02

원석/ 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富者 외로움 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 거지... 걸인 - 原石 / 정진규 얼마쯤 세월이 흘러야 나도 시인처럼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슬픔 富者 외로움 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富者라고, 그래서 마음 살림이 넉넉하다고 따스하게 말할 수..

시읽는기쁨 2008.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