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3

언젠가는 / 조은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 언젠가는 / 조은 ‘HODIE MIHI, CRAS TIBI’. 서양의 묘지에서..

시읽는기쁨 2010.12.07

통증 / 조은

광화문 육교 옆 어두운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등에 큰 혹을 진 팔순의 할머니 입김을 내뿜으며 나를 활짝 반겼다 광주리를 덮은 겹겹의 누더기를 벗겨냈다 숯막 같은 할머니가 파는 것은 천 원에 세 개짜리 귤, 영롱했다 할머니를 놀릴 마음으로 다가간 것은 아닌데 내겐 돈이 없었다 그것을 수시로 잊을 수 있는 것은 초라한 내 삶의 동력이지만 바짝 얼어 몸이 굼뜨고 손이 굽은 할머니 온기 없는 생의 외투는 턱없이 얇았다 그래도 그 할머니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웃어주었다 - 통증 / 조은 밀물처럼 통증이 밀려오는 날이 있다. 까닭이야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 원인을 헤아리지 못한다. 어제는 한밤중에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진통제를 맞았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것만이 내 유일한 위로다. 시인의 통증의..

시읽는기쁨 2007.08.22

골목 안 / 조은

실종된 아들의 시신을 한강에서 찾아냈다는 어머니가 가져다준 김치와 가지무침으로 밥을 먹는다 내 친구는 불행한 사람이 만든 반찬으로는 밥을 먹지 않겠단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더구나 자식을 잃어보지 않아서 그 아픔의 근처에도 가볼 수가 없다 웃을 줄 모르는 그녀의 가족들이 날마다 깜깜한 그림자를 끌고 우리집 앞을 지나간다 그들은 골목 막다른 곳에 산다 나는 대문을 잘 열어두기 때문에 그녀는 가끔 우리집에 와 울다가 간다 오늘처럼 친구가 와 있을 때도 있지만 얼마 전 가족을 둘이나 잃은 독신인 친구에게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멀고 낯설어 보인다 고통에 몸을 담고 가쁜 숨을 쉬며 살아온 줄 알았던 나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소멸한 슬픔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 골목..

시읽는기쁨 2007.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