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5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들어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시읽는기쁨 2012.01.25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

시읽는기쁨 2008.10.18

포카라에서의 열흘

‘데자뷰’라는 현상이 있다. 처음 가본 곳인데 전에 와본 적이 있다고 느끼거나, 처음 하는 일인데 전에 똑같은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현상이다. 현대과학에서는 뇌의 이상으로 생긴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생의 증거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아직은 해명하지 못한 뇌의 신비라 할 수 있다. 꼭 전생과 관계되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생활하면서 특정의 장소나 사람에 대해 특별한 친근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첫눈에 반하는 것과 같은 돌발적인 호감과 끌림은 사실 논리적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면 전생에서부터의 인연이 있지 않았는가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또한 전생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에 감싸이게 된다. ‘포카라’라는 말을 들..

읽고본느낌 2008.07.10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시읽는기쁨 2006.06.15

고요히 쉬기

길 아닌 길을 가면 마음도 몸도 고단하기 마련 쉬시기를 길이어도 쉬고 길 아니라도 쉬시기를 - from 이철수 님 판화 나이가 들수록 세상살이는 갈수록 힘들고 바람도 자꾸 거세집니다. 그래도 길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一切唯心造. 힘들수록 더 자주 마음을 챙기고 살아야 겠지요. 이 세상에서 저 그림처럼 가장 편한 자세로 마음을 쉬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지만 움직이는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고요한 쉼에 머물렀는지요?

길위의단상 200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