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보면 사람이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고
살아 있는 시간은 살아 있지 못한 시간보다 못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 지극히 큰 영역을 궁구하려 하므로
혼미하고 어지러워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여러 가지로 비추어본다면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가?
털끝이 반드시 지극히 미세한 것의 끝이라고.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천지가 반드시 지극히 큰 것의 궁극적인 경지라고.
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其生之時 不若未生之時
以其至小 求窮其至大之域
是故迷亂 而不能自得也
由此觀之
又何以知
毫末之足以定至細之倪
又何以知
天地之足以窮至大之域
- 秋水 2
하백(河伯)과 북해약(北海若)의 긴 대화 중 일부분이다. 둘의 대화에서는장자 철학의 주요한 논점이 말하여지고 있다. 그 철학적 내용에 대하여는 내가 설명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다만 여기서는 장자가 불가지론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 인간 의식이나 관념은 물 자체나 실체를 올바로 설명해줄 수 없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 지극히 큰 것을 헤아릴 수는 없다. 길고 짧음, 차고 기움, 나고 죽음, 성공과 실패, 알고 모름, 복과 화, 이 모든 것 또한 상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일 뿐이다. 털끝이 지극히 큰 것일 수 있고, 천지가 지극히 작을 것일 수 있다. 복은 화이고, 화는 복과 다르지 않다. 작은 인간의 머리로 구분하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서 오류가 생긴다. 더 큰 문제는 어느 한 쪽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무명(無明)이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변화해 나갈 뿐이다. 그것이 도(道)다. 도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한 마음이 될 때 심어지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