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장소에 구애되기 때문이요,
매미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때에 굳어 있기 때문이요,
편벽된 선비에게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가 강 언덕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부끄러움을 알았으니
그대와는 더불어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겠구나!
井蛙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於出於崖矣
觀於大海 乃知爾醜
爾將可與魚大理矣
- 秋水 1
강의 신인 하백(河伯)이 바다를 보고 나서 하는 탄식이 앞 부분에 나온다. "옛말에 백 가지 도를 들어도 내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하백은 넓은 바다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모두 제한된 시공간에 갇힌 존재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알지 못하고, 매미가 겨울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다의 존재를 설명해 주어도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자들이야말로 진짜 우물 안 개구리들이다. 그들은 우물 안이 천지의 전부인 줄 알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작은 잣대로 판단한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풀섶에서만 뛰노는 메추라기들은 하늘 높이 나는 봉황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그들은 보아도 알지 못한다.
장자가 이런 예화를 들며 강조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식의 좁은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비록 몸은 제한된 시공간에 구속되어 있지만 정신만은 저 넓은 우주로 훨훨 날으라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만물도 말 엉덩이에 붙은 털 하나에 다르지 않다. 하물며 인간 세상의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지지고 볶고 집착할 건더기가 없다. 인간 해방이란 자신을 지배하는 태생적인 또는 사회적인 관념이나 사고체계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있다.
요사이 일리히를 읽고 있다. 책에는 일리히를 '근원적 휴머니스트'(radical humanist)라 소개하고 있는데, 내가 볼 때 그 이름에 더 적합한 것은 장자라고 생각된다. 장자야말로 천부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철저한 인간 중심의 사상가였다. 그외의 것은세상 사람들에게 어떠한 지고의 가치로 평가받더라도 단지 군더더기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