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외할머니의 기적

샌. 2009. 6. 28. 16:43

외할머니께서 식음을 못하시고 자리에 누우신지 열흘 째가 넘었다. 하루에 죽 서너 숟가락 드시는 게 고작이다. 기력이 없으니 종일 누워서 주무신다. 내가 갔을 때도 누워 계시다가 겨우 눈을 뜨실 정도였다. 음식을 드시질 못하니 몸은 뼈밖에 안 남았다. 다리가 꼭 젓가락 같은데 안타까워서차마 바라보지를 못하겠다.

고향집에는 이모도 와 계셨는데, 모두들죽음에 대한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수를 하셨으니 지금 돌아가셔도 사실 아쉬울 일도 없다. 오래 또는 함께 산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 지금은 도리어 외할머니 본인을 위해서나 딸들을 위해서나 편히 가시는 길이 복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방에 누워 계시던 외할머니가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거실로 혼자 걸어 나오셨다. 모두들 놀라 그저 멍하니 쳐다보는데 외할머니는 내 옆에 와 앉으셨다. 살이 없는 엉덩이뼈가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가 딱 하고 났다. 그리고는 손수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셨다. 물론 몇 숟가락 정도밖에 못 드셨지만 의외의 광경에 다들 넋을 잃었다. 누구도 외할머니가 스스로 일어나시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외할머니는 연세가 90 세이었을 때 자전거와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부러져서 대구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받으셨다. 모두들 못 일어난다고 했는데 비웃기라도 하듯몇 달 뒤에는 꼿꼿이 걸어 다니셨다. 당시 동네에서는 외할머니의 치열했던 걷기 훈련이 화제가 되었다. 그뒤에 치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외할머니는100 세가 넘은 지금도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고 계실 것이다.

또 다른 신기한 일도 있다. 외할머니 머리에서 까만 머리카락이 나는 것이다. 새로 나는 머리카락 아랫 부분은 윤기도 좋은 까만색이다. 혹 이도 새로 나는 게 아니냐며 어머니는 가끔씩 외할머니 잇몸을 만져 보신다. 외할머니의 기력이조금이나마 회복된 모습을 보고 나는 돌아왔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에는 다시 수심이 짙어졌다. 여든 노인이 백 세 대노인(大老人)의 치매를 홀로 돌보는 현실이 아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워낙 연세가 많으시니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내일 돌아가신대도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향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는 날이 그때가 될 것인데, 앞으로 당분간은 전화 벨 소리에 가슴 두근거려야 할 것 같다.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지만 그래도 외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곁에 계셨으면 하고 나는 바란다.



생명은 어느 사람에게는 가녀린 촛불이지만 어느 사람에게는 모질게도 끈질기다. 최근에 존엄사 판결이 나서 인공호흡기를 뗀 할머니의 경우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가족들이나 병원측에서나 호흡기 없이도 자연호흡으로 생명을 이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생명도 존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외할머니를 지켜보면서 생명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든하늘의 뜻이라 부르든 우리는 주어지는 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누구나 마지막 순간은 아름다운 이별이 되길 기도하지만 그것 역시 부질없는 바람인지 모른다.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는 미지의 힘 앞에서 우리는 그저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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