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11)

샌. 2009. 2. 19. 16:34



히말라야에서는 밤이 괴롭다. 추위보다 더 괴로운 것은 가슴이 답답해서 자꾸 잠이 깨는 것이다. 고소로 산소가 부족하여 숨이 차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제 밤에는 자다가 코피까지 쏟았다. 에너지가 바닥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느 날처럼 5시에 일어나 짐을 꾸리고 간단한 식사 후 6시 30분에 롯지를 출발했다. 어둠이 가시기 시작하면서 설산의 봉우리가 햇살에 빛나는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나타난 급경사 오르막을 오를 때는 콧물과 재채기가 심하게 나왔다. 오늘은 우리가 ‘고난의 행군’이라 부를 정도로 10시간 이상 산악 길을 걸어야 하는 날이다. 다행히 몸은 걸을수록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오르막길을 오르니 고사인쿤드(4,380m)로 연결되는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타났다. 매년 여름이면 이 길을 따라 순례자들이 고사인쿤드를 찾는다. 고사인쿤드는 힌두교의 성지로 4천m 이상 되는 고지에 여러 개의 호수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 지형은 다른 히말라야에 비해 특이하다. 산 정상부에 넓은 고원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땅에서는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암석도 불에 탄 듯 검은색이다. 백두산 천지보다 거의 두 배나 높은 곳인데 백여 개의 호수가 있어 신비감을 자아낸다. 시바신이 꽂은 지팡이가 변해 호수로 되었다는 고사인쿤드는 매년 여름이면 수천 명의 순례객들이 모여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다. 그러면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생에서의 죄업이 소멸한다고 한다.





우리가 찾은 날은 호수는 얼음으로 꽁꽁 얼어있었고 아무도 없었는데 멀리서 북 치는 듯한 소리가 둥둥 하며 비슷한 간격을 두고 들렸다. 가이드의 말로는 얼음 깨지는 소리라고 했다. 그런데 주위의 산들에 의해 공명이 되어선지 전혀 얼음 깨지는 소리와는 다른 부드러운 소리였다. 마치 호수가 비밀스런 말을 건네는 듯 하고, 다르게 들으면 독경을 읊는 듯도 해 무척 신기했다.


트레킹의 후반부 하이라이트가 바로 이곳 고사인쿤드다. 겨울이어서 푸르고 깊은 물을 볼 수는 없었으나 흰 얼음으로 덮인 적막함은 또 다른 신비감을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밖에 머물 수 없었다. 다음 롯지까지 가는 거리가 멀어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A는 고사인쿤드의 물을 담으려 빈 병까지 준비했지만 호숫가로 내려가 보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고사인쿤드를 지나서는 쉼 없이 계속 걸었다. 이번에는 일부러 선두 그룹에 들어갔는데 빠르면 빠른 대로 몸은 잘 적응해 주었다. 빌빌거리다가 갑자기 힘을 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동안 꾀병을 부린 거라고 놀려댔다. 길은 협곡 사이의 너덜지대를 따라 실처럼 이어졌다. 산에서 내려온 돌과 자갈들이 엄청나게 많이 깔려 있는데, 이것도 빙하가 만든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빙하가 사라졌지만 앞으로 2 만 년 뒤에는 이곳은 다시 거대한 눈과 얼음으로 덮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때 인간이 이곳에 살았고, 낯선 이들이 트레킹을 하러 오곤 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라우레비나 고개(4,610m)를 넘은 뒤부터는 내리막이었다. 이젠 카트만두까지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오늘만도 여러 개의 산줄기를 타고 넘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아니 이번 트레킹에서 최고의 난코스 길이었다. 응달에는 녹지 않은 눈이 미끄러웠고,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급경사을 올라야하는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디에서 짧게 점심을 먹은 시간 외에는 계속 걷기만 했으니 오늘은 모두들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온 곳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럴 때면 작은 발걸음의 위대함을 체험하게 된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이면 결국은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도 작은 발걸음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하루하루가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하루들이 모여 나를 만들고 내 인생을 조각하는 것이다.




여행에도 ‘좋은 여행’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착한 여행’ 또는 ‘공정 여행’(Fair Travel)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내 개인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내가 만난 이들의 행복까지 살피는 여행이라고 한다. 또 내 움직임은 누군가의 자원을 쓰는 것이며,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과 수고로 이루어짐을 잊지 않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히말라야 트레킹도 반성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트레킹 바람이 불면서 히말라야 오지 마을들은 외부인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다. 주민들의 집은 트레커를 수용할 롯지로 변했고, 돈맛을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환경파괴가 수반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트레킹을 즐기면서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의 돈 냄새를 풍기며 오만한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전통적 삶을 파괴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사실 이번 트레킹 중에도 그런 사례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비슷한 것이 여기서는 쵸르텐이다. 우랄알타이계의 공통된 문화인 듯한데 불교가 전래되기 전의 토속종교와 관계된 것이다. 작은 건물을 중심으로 깃발이 많이 매달려 있어 바람에 나부끼는데,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의 의미가 세상사람 모두에게 전파되기를 바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깃발에는 종교적인 상징이나 기도문이 적혀 있다. 그런데 일행 중 누구는 이 초르텐에 자신이 가져간 기원문을 걸었는데 그냥 차라리 합장 기도만 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나아보였다. 또 주민들에게 사전 양해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라든가 일부 무례해 보이는 행위들도 있었다.


조심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트레킹이 되려고 노력을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현지인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불가피하게 여행을 해야 한다면 좀더 조심스러워져야겠다는 것만은 이번에 더욱 절실히 느꼈다. 누군가가 제안한 ‘공정 여행을 하는 10가지 방법’은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1.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나 음식점, 교통편, 여행사를 이용한다.

2.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로 만든 기념품(조개, 산호, 상아)은 사지 않는다.

3. 동물을 학대하는 쇼나 투어에 참여하지 않는다.

4.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비행기 이용을 줄이고, 전기와 물은 아껴 쓴다.

5. 과도한 쇼핑보다는 공정무역 제품을 이용한다. 지나치게 깎지 않는 센스!

6. 현지의 인사말과 노래, 춤을 배워보자. 작은 선물을 준비해 가자.

7. 여행지의 생활 방식과 종교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춘다.

8. 적선보다는 기부를! 여행 경비의 1%는 현지의 단체에 기부한다.

9. 현지인과 한 약속을 지키자. 사진이나 물건 보내기.

10. 내 여행의 기억을 기록하고 공유하자.




멀리 남쪽으로는 낮은 산 능선들의 겹쳐진 풍경이 고왔다. 마치 지리산에 올랐을 때 보이는 풍경과 흡사했다. 저 산들 사이 어디쯤에 카트만두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사흘을 더 걸어서 그곳까지 가야 한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18 km였다. 로우레비나약을 6시 30분에 출발하여 저녁 5시에야 곱테(Ghopte)에 도착했으니 무려 10시간 30분을 걸은 셈이다. 거리로는 지난번에 캰진곰파에서 랑시샤카르카를 다녀온 데 비해서는 짧지만 길 자체는 몇 배나 더 힘든 구간이었고 시간도 더 걸렸다. 더구나 오늘은 점심시간 외에는 거의 휴식이 없었으니 순전히 걸은 시간만 10 시간 가까이 될 것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과연 오늘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모두들 목적지에 골인했다. 숙소인 멘도(Mendo) 롯지는 시설이 열악했지만 다들 피곤해서 일찍부터 골아 떨어졌다. 나는 다시 감기약을 먹었다. 약에는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는지 이 약만 먹으면 정신없이 잠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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