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불성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 뒤 컵의 물을 마시다가 앉은 채 그냥 잠들어 버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에 깨어나니 컵이 기울어져 물은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엄청 피곤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니 몸은 좋아졌다.
식사를 하고 6시 40분에 툴로샤브루를 출발했다. 하늘은 엷은 비단구름이 줄지어 곱게 덮여 있다. 그동안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다랑이 밭과 농가를 지나 길은 산으로 숨더니 숲 속으로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길에는 전에 내린 눈이 남아 있어 히말라야에 들어서 처음으로 눈을 밟아 보았다. B와 맨 뒤에서 일행을 따라갔는데 눈 가운데 피어 있는 작은 꽃을 구경하느라 자꾸 뒤쳐졌다.
숲을 벗어나 능선에 오르니 사방이 열리면서 가네시히말과 랑탕히말의 설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이면서 ‘아름다워!’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전망을 올라가면 갈수록 좋아졌다. 날 위해 준비해 놓은 듯한 대자연의 잔치에 행복해 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인디언들은 숲 속을 뛰어가다가 한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듯 멈춰 선다고 한다. 바쁘게 달리던 몸의 속도를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영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란다. 그렇다면 느릿느릿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 지금 내 영혼은 무척 평안할 것 같다.
여기서 점심을 먹었는데 나는 유일하게 달밧을 시켰다. 달밧은 네팔의 주식인데 ‘달’은 녹두 스프, ‘밧’은 밥을 의미한다. 야채와 카레가 섞인 반찬이 밥과 함께 한 접시에 나온다. 쌀이 우리 입에 맞지 않는데다 반찬 향이 강해 다른 사람들은 잘 먹지를 못했다. 달밧만 먹을 수 있다면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절반의 고민은 덜 수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멀리 안나푸르나와 마나슬루도 보였다. 둘은 한국 등반대가 자주 오르는 산이라 우리 귀에도 익다. 내 막내 동생도 안나푸르나 원정대에 속해 저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히말라야가 참 멀리도 느껴졌는데 이제 나도 그 속에 들어있다. 당시에도 히말라야를 그리워했었지만 이렇게 느지막이 현실화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멋진 경치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 했을 때 가족이 생각나는 것은 혼자만 즐기기에는 아깝고 미안한 마음 탓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된다면 히말라야의 풍경을 꼭 구경시켜주고 싶다. 히말라야는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번은 와봐야 할 장소라고 생각한다.직접 히말라야에 와서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곧 저녁이 되었고 히말라야의 하늘과 땅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껏 많은 일몰을 보았지만 이렇게 황홀하고 장엄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절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풍경의 오르가즘’이라고 한 말이 이 때에 어울릴까, 내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모든 아름다운 순간은 짧은 법이다. 절정을 지나 빛은 사그라지고, 그리고 미광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이 노을의 감동은 내 기억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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