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10)

샌. 2009. 2. 18. 09:02

인사불성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 뒤 컵의 물을 마시다가 앉은 채 그냥 잠들어 버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에 깨어나니 컵이 기울어져 물은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엄청 피곤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니 몸은 좋아졌다.




식사를 하고 6시 40분에 툴로샤브루를 출발했다. 하늘은 엷은 비단구름이 줄지어 곱게 덮여 있다. 그동안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다랑이 밭과 농가를 지나 길은 산으로 숨더니 숲 속으로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길에는 전에 내린 눈이 남아 있어 히말라야에 들어서 처음으로 눈을 밟아 보았다. B와 맨 뒤에서 일행을 따라갔는데 눈 가운데 피어 있는 작은 꽃을 구경하느라 자꾸 뒤쳐졌다.





숲 들머리에 서있는 포플라를 닮은 키다리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내 그림자도 키다리가 되었다.


숲을 벗어나 능선에 오르니 사방이 열리면서 가네시히말과 랑탕히말의 설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이면서 ‘아름다워!’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전망을 올라가면 갈수록 좋아졌다. 날 위해 준비해 놓은 듯한 대자연의 잔치에 행복해 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인디언들은 숲 속을 뛰어가다가 한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듯 멈춰 선다고 한다. 바쁘게 달리던 몸의 속도를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영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란다. 그렇다면 느릿느릿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 지금 내 영혼은 무척 평안할 것 같다.





12시에 3,584m의 촐랑파티(Cholang Party)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어 조망이 일품이었다. 주위에는 전나무 거목들이 많았다.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고, 눕거나 책을 보거나 일광욕을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여기서 점심을 먹었는데 나는 유일하게 달밧을 시켰다. 달밧은 네팔의 주식인데 ‘달’은 녹두 스프, ‘밧’은 밥을 의미한다. 야채와 카레가 섞인 반찬이 밥과 함께 한 접시에 나온다. 쌀이 우리 입에 맞지 않는데다 반찬 향이 강해 다른 사람들은 잘 먹지를 못했다. 달밧만 먹을 수 있다면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절반의 고민은 덜 수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멀리 안나푸르나와 마나슬루도 보였다. 둘은 한국 등반대가 자주 오르는 산이라 우리 귀에도 익다. 내 막내 동생도 안나푸르나 원정대에 속해 저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히말라야가 참 멀리도 느껴졌는데 이제 나도 그 속에 들어있다. 당시에도 히말라야를 그리워했었지만 이렇게 느지막이 현실화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4천m 가까이 되는 곳이지만 다행히 고소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캰진곰파에서 고소병으로 호되게 고생했던 사람도 여기서는 괜찮을 걸 보니 우리 신체가 이젠 고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 싶다. 오늘 종점의 마지막 구간에서는 히말라야가 첫 경험인 초보 넷이서 맨 뒤를 함께 걸었다. 모두들 이번 랑탕 트레킹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는데 동감을 했다. 그리고 내년에도 히말라야를 오고 싶다고, 그래서 안나푸르나에서 다시 만나자고 다짐을 했다.





오후 3시에 고도 3,930 m의 로우레비나약(Laurebina Yak)에 도착해서 모닝뷰(Morning View) 롯지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이번 트레킹 중 전망으로는 최고의 곳이었다. 뜰에 서면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마차푸차레, 가네시히말, 랑탕히말 등의 설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광경이 장관이었다. 나무로 된 롯지는 좁고 허술했으나 방에서 보이는 경치는 역시 최고였다. 세계 어느 일류 호텔이 이보다 더 멋진 전망을 줄 수 있으랴. 나는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워 히말라야를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멋진 경치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 했을 때 가족이 생각나는 것은 혼자만 즐기기에는 아깝고 미안한 마음 탓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된다면 히말라야의 풍경을 꼭 구경시켜주고 싶다. 히말라야는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번은 와봐야 할 장소라고 생각한다.직접 히말라야에 와서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곧 저녁이 되었고 히말라야의 하늘과 땅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껏 많은 일몰을 보았지만 이렇게 황홀하고 장엄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절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풍경의 오르가즘’이라고 한 말이 이 때에 어울릴까, 내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모든 아름다운 순간은 짧은 법이다. 절정을 지나 빛은 사그라지고, 그리고 미광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이 노을의 감동은 내 기억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저녁 노을의 감동에 마취가 되어선지 몸 컨디션은 좋았다. 롯지의 나무 벽은 틈이 많아 히말라야의 냉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J가 오늘도 담요를 빌려다 주었다. 이제 완주할 자신과 의욕이 생겨 기뻤다. 다시는 포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중무장을 하고 담요를 덮은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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