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한겨레 칼럼 셋

샌. 2009. 2. 11. 08:16

목표는 ‘생존’이다 / 김별아


얼마 전, 죽을 뻔했다. 말 그대로 유명을 달리해 황천으로 갈 뻔했다. 이러구러 지극히 평범한 오후였다. 동네에 볼일이 있어 실내복에 점퍼만 달랑 걸친 채로 털레털레 집을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막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빠르게 내리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차,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어느새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옷깃을 스쳐 발밑에 뒹굴고 있었다. 쪼개진 나머지 반 토막은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의 보닛을 움푹 찌그러뜨렸고, 주위에서 “누구야? 사람이 죽을 뻔했잖아!” 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베란다에서 얼음덩이를 던진 누군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왜, 어쩌다가 살상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그것을 던졌는지 물어볼 길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화보다 웃음이 난다. 단 몇 초의 조화, 단 몇 센티의 간극으로 죽을 뻔했다 살아난 나는 주위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자꾸만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졸지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오니 세 가지 생각이 났다. 첫 번째는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식전 꼭두부터 걸어온 어머니의 전화. 불길한 전조는 과학적인 근거 너머에 있다. 남대문이 불타기 이전부터도 나는 슬슬 신비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는 며칠 전 장편소설을 초고나마 탈고하길 다행이라는 생각. 그런데 아직까지 공중에서 날아온 얼음 조각에 맞아 죽은 작가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여기서 죽었다면 사람들은 소설보다 내 머리를 맞힌 얼음덩이를 더 오래 기억할 테다. 그리고 시적시적 발걸음을 옮기며 마지막 세 번째, 난데없이 던져진 방향 없는 분노를 생각했다. 성질은 좀 나빠도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하지 않고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익명의 증오 앞에서는 익명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철없는 아이의 장난이었을까, 애꿎은 두꺼비에게 돌을 던지는 화풀이였을까, 유행어처럼 여기저기 갖다 붙여대는 ‘사이코패스’의 짓이었을까.


기실 내가 이번 정권의 통치기간에 가장 걱정하는 것은 경제 불황도 역사 왜곡도 남북관계 파탄도 아니다. 임진왜란도 겪었고 식민지 시대도 견뎠는데 무엇이라고 못 버티겠느냐는 배짱과 함께, 아무리 농간을 부려도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있고, 그 끝이 보이는 것들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가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얼음덩이처럼, 출구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은 무섭다. 소통과 저항의 통로를 동시에 잃은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이 연쇄살인범 검거 뉴스로 덮여 버리는 상황을 개탄하지만, 두 살인극은 ‘나비효과’처럼 서로 교묘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망루로 올라간 약자들의 날갯짓이 공권력에 처참히 꺾일 때, 인간의 가치를 애완용 시베리안 허스키의 그것만큼도 여기지 않는 분노와 증오와 환멸의 허리케인은 언제든 사회 곳곳에서 휘불 수밖에 없으리니.


집에 돌아와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아직 놓을 수 없는 손들에게. 한동안 나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했다. 탐욕과 무지로 부도덕한 사회를 선택한 그들을 냉소했다. 죽어 보라지, 다 자업자득이야. 하지만 내 마음의 날선 화살이 결국 내 심장을 쏜다. 혼자 살아갈 방도는 없다. 어떻게든 주위의 빈손들을 그러쥐고 살아내야 한다. 당분간 내 목표는 ‘생존’이다.



말은 없고, 헛소리만... / 김선주


몹시 울고 싶은 날이면 영화관에 간다. 슬프다고 소문난 영화를 찾아서. 평일 대낮에 극장에 가면 관객이 별로 없다. 한 구역을 통째로 차지하고 앞좌석에 발을 걸치고 영화 속의 슬픔에 감정을 이입하고 내 설움을 얹어서 실컷 운다. 하염없이 울고 나오면 마음의 긴장도 분노도 슬픔도 해소된다.


<워낭소리>도 주변에서 슬프다고, 눈물난다고, 보증을 해주어서 보러 갔다. 평일 대낮인데도 매진이었다. 소문이 소문을 낳아서 독립영화사상 관객 동원 최고의 기록을 깨뜨린 지 오래고 7개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가 지금은 70여개로, 다시 150개로 확산되어서 앞으로 관객 수가 50만이 될지 100만이 될지 모른다고 한다.


영화는 슬프고도 재미있었다. 소와 함께 고된 노동을 하고 9남매를 키우고 늙어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다. 지금은 노동을 하고 살 필요는 없지만 농사짓고 풀 베고 소 먹이고 사는 것밖에 모르는 부부는 습관처럼 일을 하고 습관처럼 티격태격 타박한다. 할아버지는 아파 아파하면서도 일을 한다. 할머니는 싫어 싫어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소를 먹이고 밭을 매고 소죽을 쑨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생로병사를 거치는 과정, 생명의 덧없음은 저절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소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노동에서 벗어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노동도 삶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울고 나왔는데도 미진했다. 생명을 다하고 죽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분노나 원망이 없는 깨끗하게 정화되는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아직 살아보지도 못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기도 전에, 기운이 펄펄 남아 있는데도 그냥 죽는 죽음은 억울하고 서럽고 원망스럽다. 요즘 내 마음의 상태가 그런 진한 눈물을 흘리고 싶었던 탓인가 보다. 소의 눈에서 진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는 것을 보면서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용산 철거민 가족들의 눈물을 생각했다. 생활고로 목숨을 끊는 젊은 가장을, 3년 동안만 살고 고기 값으로 팔려나가는 소를 생각하며 마구잡이로 취급되는 생명에 대한 분노 같은 것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이처럼 힘든 시대는 내 생전에 없었던 것 같다. 평생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왔는데도 글쓰기가 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힘이 든다. 몇 년 전에 글이 세상을 한 뼘도 바꾸지 못하는데 글은 왜 쓰는가라는 탄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새파란 후배가 글이 언제 세상을 바꾼 적이 있나요. 그저 위안을 줄 뿐이지요. 시들하게 답했다. 당시에도 아연했지만 그때의 탄식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지금은 글쓰기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역사학 교수에게 물었다. 역사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세상은 역사의 잘못을 반복하는데. 역사학자는, 원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지요… 그러지 말자고 가르치는 것이 역사지요라고 힘없이 답했다.


더 이상 말이 말이 아니고 글이 더 이상 글이 아닌 세상이다. 말에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말은 그냥 소리일 뿐이다. 헛소리다. 대통령이 법과 원칙을 말하고 기본에 충실하겠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그냥 소리로 들리는 것은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 아닌 말에 대해, 말 아닌 말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말을 하려니 공허하다. 헛소리에 정면으로 대응하자니 힘이 빠진다.

용산 철거민 참사와 관련해서 검찰 발표가 나왔다. 철거민들과 용역회사 직원들이 범인이란다. 이것도 말일 뿐 마음이나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 헛소리와 짜맞춘 각본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따지려 드니 헛심만 든다. 다 그만두고 그냥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 김규항


어떤 이가 그러더란다. "김규항 씨의 교육관은 존중해요. 하지만 아빠 때문에 아이가 희생되어선 안 되잖아요?" 올해 중3이 되는 내 딸이 학원 같은 데 하나도 안 다니는 걸 두고 한 이야기였다. '희생이라...'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땐 씩 웃고 말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내내 걸렸다. 그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지난 해 여름 내내 촛불집회에 개근한 사람이며, 이명박이라면 아주 이를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걸 아이를 희생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이가 학원을 안 다니면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고 경쟁에서 뒤쳐지면 결국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명박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가는, 자신이 세계관과 철학과 신앙에서 이명박과 정반대라 자부한다는 그는 이명박 씨와 적어도 한 가지는 같아 보였다. 바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행복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우연히 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참 오랜만에 그 정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제주도의 해녀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평생 물질로 살아 온 여든 된 해녀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인류가 생긴 이래,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해왔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게 남보다 앞서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런 걸 오히려 불편해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눈에 밟혀 더디더라도 함께 가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앞의 것은 한줌의 지배계급에게, 뒤의 것은 대다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생각이다. 인류 역사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의 대립이기도 했다.


인류가 그나마 여태껏 사람 사는 세상의 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어떤 흉악한 세상에서도, 어떤 악랄하고 탐욕스럽고 막되어먹은 놈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도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앞서도,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것을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수천 수만년 동안 유지되어 온 생각이 오늘 사라지고 있다. 경쟁력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남보다 많이 가질수록 남보다 앞설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한줌의 지배계급의 생각이 아니다. 대다수 노동자의 생각이며 대다수 농민의 생각이며 대다수 서민들의 생각이다. 불거지는 사회문제에선, 이를테면 언론노조 파업이나 철거민 살해 사건 따위에선 짐짓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오늘 한국 성인들의 사회적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아이들 교육문제에선 여지없이 정직하게 드러난다.


오늘 많은 사람들, 민주적이고 개혁적이며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명박이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고 있다!" 백번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명박 씨가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기 전에 이미 우리 스스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천 수만년 동안 우리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온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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