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상호가 죽었다.
장사를 치르지 못했다는 소식을 공자가 듣고
자공을 시켜 일을 돕게 했다.
자공이 가서 보니 어떤 자는 바둑을 두고 있고
어떤 자는 거문고를 두드리며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오 상호여! 이미 그대는 참(眞) 자네로 돌아갔거늘!
우리는 아직도 사람의 탈을 쓰고 있구려!"
자공은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말했다.
"감히 묻겠는데 시체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예입니까?"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자가 어찌 예의 뜻을 알겠는가?"
莫然有間 而子桑戶死
未葬 孔子聞之
使子貢往侍事焉
或編曲
或鼓琴
相和而歌 曰
嗟來 桑戶乎 而已反其眞
而我猶爲人의
子貢趨而進 曰
敢問 臨尸而歌 禮乎
二人相視而笑 曰
是惡知禮意
- 大宗師 8
이번에는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이라는 세 사람의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나온다. 역시 생사를 초월한 자유인들이며, 인간이 정한 규범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셋 중에서 자상호가 죽었다. 공자가 자공을 시켜 조문을 가게 했는데 두 친구는 주검 앞에서 바둑을 두고 노래를 부르며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자공이 상예(喪禮)에 대해 묻다가 도리어 핀잔을 듣는다. 참된 예는 세상의 예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공자는 그들은 세상 밖을 노니는 사람들이라며 세속의 예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이해한다. 여기서 장자는 공자의 입을 통해 유가 사상을 뛰어넘는 자신의 사상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인간을 제약하는 모든 것을 - 인(仁), 의(義), 예(禮), 또는 어떤 거룩한 명분이든 - 거부한다.
장자에게서 죽는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앞에서 삶은 꿈이고, 죽음은 깨어남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여기서도 세 사람은 삶을 혹이나 사마귀처럼 군더더기로 생각하고, 죽음은 부스럼을 떼어내고 종기를 째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죽음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세속의 예를 그들이 따를 리가 없다. 삶에 대한 애착을 놓으니 일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태도는 종교적 순교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오 상호여! 이미 그대는 참자네로 돌아갔거늘! 우리는 아직도 사람의 탈을 쓰고 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