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는 나에게 형체를 주어 실어주고
삶을 주어 수고롭게 하며
늙음을 주어 편안케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지.
그러므로 내 삶을 잘하는 것은
내 죽음을 잘하는 수단이라네.
지금 대장장이가 쇠를 녹이는데
쇠가 펄펄 뛰면서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명검이 되겠다'고 한다면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쇠라고 생각할 것이네.
지금 사람 형체의 거푸집이
'사람으로만 있겠다'라고 말한다면
조물주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네.
지금 천지를 하나의 큰 용광로로 생각하고
조화옹을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육체가 태어남은 꿈이요,
죽음은 깨어남이거늘!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生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今之大冶鑄金
金踊躍 曰
我必且爲막야
大冶必以爲不祥之金
今犯人之形
而曰 人耳人耳
夫造化者
必以爲不祥之人
今一以天地爲大爐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
成然寐
거然覺
- 大宗師 7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려(子黎), 자래(子來)라는 네 벗이 있었다. 자여가 병이 들었는데, 곱사등이 나오고 턱은 배꼽에 붙으며 어깨가 머리보다 높아지면서 몸이 괴상하게 변해가는병이었다. 그러나 문병 온 친구에게 자여는 태연하게 말한다. "내 어깨가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겨주겠네. 내 팔뚝이 화살이 된다면 나는 부엉이 구이를 맛볼 수 있겠지. 내 엉덩이가 바퀴가 된다면 나는 이것을 타고 다닐 것이네." 자여는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싫어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이 한가로워져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자래 또한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식구들이 울며 슬퍼하는데 문병 온 자려가 호통을 친다. "비켜라! 자연의 조화를 슬퍼하지 말라! 위대하다! 조물주는 또 자네를 무엇이 되게 할까? 어디로 데려갈까?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까?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까?" 위의 글은 그런 자려에게 대답하는 자래의 말이다. 정말로 못 말리는 친구들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장자를 읽었을 때 이 얘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본다는 사상을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몸이 기형으로 변해가거나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태연작약할 수 있는 평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삶에 집착하는 우리로서는 공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는 달관의 경지라 할 수 있다. 대개는 대붕을 비웃는 메추라기처럼 그들을 광인(狂人)으로 치부해 버리기 쉽다.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자연에 대한 순명(順命)인지도 모른다. 네 벗은 몸이 그 지경이 되어도 결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연의 위대한 변화에감탄하며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구약성서의 욥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복(福)이나 인과응보적 개념이 전혀 없다. 그냥 주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감사한다. 세상사에 매이고 집착하지 않는다. 장자는 이것은 현해(縣解)라고 불렀다. 현해란 목 매단 밧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다. 스스로가 만든 그런 사슬에서 풀려나오는 것이 해방이며 현해다. 여기에 나오는 네 사람은 현세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