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43]

샌. 2008. 10. 12. 07:45

남백자규가 여왜선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데

얼굴이 어린아이 같으니 어쩐 일이요?"

여왜가 말했다. "나는 도를 알기 때문이오."

자규는 물었다. "도를 배울 수 있소?"

여왜가 답했다. "오! 어찌 가능하지 않겠소.

다만 당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오.

복량의는 성인의 재능은 있으나

성인의 도가 없었소.

나는 성인의 도는 있으나

성인의 재능은 없었소.

내가 그를 가르치려 한 것은

성인이 될 기미가 있었기 때문이오.

꼭 그렇지만 않지만 성인의 도를

성인이 될 재목에게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오.

나는 그에게 오직 스스로를 지키라고 가르쳐준 것뿐인데

사흘이 지나자 천하를 버릴 수 있었소.

이미 천하를 버린 이후에

나는 또 스스로를 지키도록 했더니

이레가 지나자 외물을 잊어버릴 수 있었소.

이미 외물을 잊어버렸으므로 나는 더욱 지키도록 했더니

아흐레가 지나자 이제는 삶을 잊어버렸소.

삶을 놓아버리자 그 후로는 눈부시게 통달해 갔소.

통달된 이후로는 능히 자주독립할 수 있었고

자주독립하니까 능히 고금이 없어졌고

고금이 없어지니까

능히 죽음도 삶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소."

 

南伯子葵 問乎女

子之年長矣

而色若儒者 何也

曰 吾聞道矣

葵曰 道可得學斯

曰 惡惡可

子非其人也

夫卜梁倚 有聖人之才

而無聖人之道

我有聖人之道

而無聖人之才

吾欲以敎之

庶幾其果爲聖人乎

不然 以聖人之道

告聖人之才 亦易矣

吾猶守而告之

三日 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 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 而後能外生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而後能見獨

見獨而後能無古今

無古今而後

能入於不死不生

 

- 大宗師 5

 

장자는 도(道)를 얻을 수 있고[得道], 배울 수 있다[學道]고 말한다. 여기서는 도에 이르는 과정을 여우의 입을 빌려 일곱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여우()는 글자 뜻대로 하면 '등 굽은 여인'이라는 뜻인데, 기세춘 번역본에 보면 여왜(女媧)로 읽고 여신(女神)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여우는 여성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남백자규가 찾아가서 도에 대해 묻고 설명을 듣는 상대방을 여자로 설정했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장자의 파격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도에 이르는 일곱 단계를 순서대로 보면, 외천하(外天下) - 외물(外物) - 외생(外生) - 조철(朝徹) - 견독(見獨) - 무고금(無古今) - 불생불사(不生不死)이다. 앞의 외(外)는 '잊는다'(忘) 또는 '버린다'(棄)는 뜻이니, 세상일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과 삶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득도에서는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은 조철(朝徹)인데 새벽기운 같이 꿰뚫어 봄이다. 그 다음은 견독(見獨)으로 진리와 하나 되었음으로 스스로 선다. 그가 보는 것이 곧 도(道)다. 그리고 끝으로 시간에서도 해방되고 삶과 죽음마저 초월한 단계에 이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구경해탈(究竟解脫)의 경지다.

 

이 득도의 과정은 모든 종교나 영적 가르침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과 '진리와 하나됨'의 체험이야말로 종교의 알짬인 것이다. 작금의 종교는 너무나 물질적이고 기복적인 경향으로 기울고 있지만 성현들의말씀은 실은 그와 반대이다. 세상에 대한 욕심, 삶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고 한다. 종국에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마저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자는 마지막으로 죽음도 삶도 없는 절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라고 한다. 그러나 도(道)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멀다. 성인지재(聖人之才)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어디 확연대오(廓然大悟)를 바라기나 할 노릇이랴. 그저 한 걸음씩 걸어나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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