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인생

샌. 2008. 10. 21. 12:17

최근에 중국 소설 세 권을 읽었다.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그리고 위화(余華)의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이었다. 다이호이잉이 문화대혁명이 지식인에게 준 상처를 그렸다면, 위화는 역사에 짓밟힌 민중의 아픔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인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생>을 읽는 동안 여러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은 푸구이라는 노인이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을 들려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뱅이가 된다. 고난의 삶은 재산뿐만 아니라 가족마저도 모두 앗아간다. 착하기만 한 아내 자전과 두 자녀 유칭과 펑샤, 사위인 얼시와 손자 쿠건이 각자 기막힌 사연들로 차례로 죽고 노인은 혼자 남는다. 푸구이의 삶은 국공내전과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을 거치며 거친 역사의 물결에 내팽개쳐진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아무리 짓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참아내며 살아가게 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동감하게 된다. 그것은 참 비장한 일이다.


작가의 서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이 말에서 저자의 세상을 보는 눈이나 이 소설을 쓴 배경 등이 읽혀진다.


온갖 고난과 슬픔을 체험한 푸구이는 고통을 겪은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다. 그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도살되기 직전의 늙은 소를 사서는 밭을 갈며 산다. 그리고 소의 이름은 자신과 같은 푸구이라고 부른다. 소설 첫 부분에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족하며 살아가는 푸구이의 노래가 실려 있다.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어 안 가려네." 푸구이는 결국 노자와 장자의 나라에 이른 것 같다.


이 소설의 원제목은 <活着>이다. 활착은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사는 것을 뜻한다. 생명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버티고 견뎌낸다.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휘어지기는 하지만 꺾이지는 않는다. 살만하면 넘어지지만, 포기하려고 하면 어디선가 살아야지 하는 힘이 생긴다. 생명력은 끈질기고 위대하다. 그것은 인간의 굴레이기도 하지만 운명에 맞설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샘솟는 그 생명력에 대한 찬양으로 나에게는 읽혀졌다.


<인생>은 장이모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비디오라도 구해서 꼭 보고 싶다. 그리고 푸구이를 비롯한 동시대 중국인 불행의 원인은 대부분이 오도된 정치 이념이나 반인간적인 체제 탓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푸구이의 은둔과 자족은 좀 생경 맞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작가가 최고의 가치로 제시한, 사물의 이해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에 대한 무차별심,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 등을 생각할 때 위화는충분히 고상한 작품을 썼다는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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