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사당에서 홍제까지 걷다

샌. 2008. 6. 28. 19:30

지난 주에 테니스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다. 네트 앞에 떨어진 공을 받으러 급히 달려나가다가 다리 뒤의 근육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절룩거리며 걸었으나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그래서 오늘까지는 집에서 푹 쉬려고 했으나 아침부터 시작된 옆 공사장의소음 때문에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집 옆에서 신축 아파트 공사를 하는데 그 소음이 장난이 아니다. 유독 소음에 약한 나로서는 철근이 부딪치는 금속성의 굉음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도망을 치듯 아침도 먹지 않고 부리나케 베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목적지도 없이 떠났는데 자연스레 뒷산을 넘어 국립현충원을 지나 한강으로 나갔다. 여기서는 여의도나 잠실 방향으로 갈 수 있고, 또는 강을 건널 수도 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목적지를 홍제천으로 정했다.

 



동작대교를 건넜다. 매일 출퇴근하는 다리지만 걸어서 건너는 것은 처음이다.동작대교는 가운데에 전철이 다니는 철로가 있고, 양쪽으로 3차선의 도로가 있다. 그래도 한강의 다른 다리에 비하면 교통량이 적은 편이다.

 



동작대교에서 바라본 이촌지구의 둔치 모습이다. 멀리 여의도의 63 빌딩이 보인다. 이곳은 따로 흙으로 된 보행로가 있어 좋았다. 오래 걷다보면 확실히 흙길이 발에 무리가 가지 않고 편하다.

 



한 시간 반 정도를 계속 걸은 뒤 여의도가 건너편에 바라보이는 여기서 1차 휴식을 취했다. 처음에는 아픈 다리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더니 이제는 감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데 혼자서만 소리에 대해 짜증을 내는 못된 소갈머리에 대해 걸어오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허나 성질이 그리 생겨먹은 걸 어찌 하겠는가. 이젠 수양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내가 피하는 도리밖에는 없는 것 같다.

 





망원지구에서 예쁜 길을 만났다. 지금껏 한강을 걸으면서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이런 길을 만나면 지친 다리도 다시 힘을 얻는다.나무 사이로 적당히 휘어진 흙길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인공적으로 만들었으되 인위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고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

 



풀 사이에 피어 있는 홑왕원추리. 둔치에는 이제 여름꽃들이 피어 나고 있었다.

 



드디어 홍제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다다랐다. 여기가 바로 합류 지점이다. 홍제천은 종로구 평창동에서 마포구 성산동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이 11 km의 하천이다. 홍제천은 며칠 전에 통수식을 가지고 제 2의 청계천이 되었다. 인공적으로 한강에서 물을끌어올려 흘려보내는 것이다. 사람이 하천을 죽여 놓았다가는 이제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홍제천 위로는 내부순환로가 지나가고 있다.덮개가 씌어져 있어 하루 종일 햇빛 하나 들지 않는 하천이다. 복개된 하천이 죽은 하천이라면, 이런 것은 거의 빈사 상태다. 그동안은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 있었는데, 그나마 인공적으로 물을 흘러보낸다니 이제 하천 흉내는 낼 것 같다.

 



하천 가운데에 저렇게 시멘트 교각을 박을 구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동차를 위해 하천을 죽여도 괜찮다는 발상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중요하고, 생명이 소중하고, 살아있는 하천이 더 귀하다. 언젠가는 저 교각도 뜯어내고 홍제천을 온전한 하천으로 복구시켜야 할 것이다.

 



백련교 부근에는 분수도 만들어 놓았다. 2 년에 걸친 정비사업 덕분에홍제천은 물이 흐르는 생태 하천으로 변신했다. 아이들이 물에서 노는 모습은 참 보기에 좋았다. 특히 홍제천은 청계천과 달리 바닥을 시멘트로 바르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흙바닥이다. 그래서 하류로 내려가면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수량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홍제천의 한계는 위를 지나가며 머리를 짓누르는 내부순환로다. 아무리 정비를 한들 온전한 하천으로의 회복은 이 고가도로가 있는 한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홍제천 하면 떠오르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있다. 병자호란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군은 조선의 여인들을잡아갔다는데,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수십 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통분한 일이다. 세월이 흘러 다시 환국한 여인들은 더럽혀진 몸이라고 천대를 받았다는데, 그들을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고 뒤에 화냥년으로 변했다고 한다.이것이 사회문제화 되자 인조는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고 무악재를 넘어 도성 안에 들어오면 정절을 논하지 말라'는 교서까지 내렸다. 홍제(弘濟)란 '널리 구제한다'는 뜻이니, 홍제천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인지 모른다. 아마 그 당시에집을 찾아 고국으로 돌아오는 불쌍한 여인들은 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그녀들에게 용서를 빌며 따스하게 맞아주지는 못할 망정 더러운 몸이라고손가락질을 했다니당시의 남자들은 참 뻔뻔스럽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리어 손가락질 받을 대상은 바로 저희들이 아니었던가.

 

오늘은 소음에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한강과 홍제천을 걷게 되었다. 사당동 집에서 출발하여 동작대교를 건너 한강을 따라 걷다가 성산대교에서 홍제천을 따라 홍제역까지 걸었다. 걸은 시간은 다섯 시간, 걸은 거리는 약 22 km였다. 특히 오늘은 반 이상의 구간이 처음 걸은 길이라서 의의가 컸다. 장마철이라 날이 흐려서 걷기가 좋았고, 홍제천을 걸을 때는 간간이 비도 뿌렸다. 다 걷고나서 사우나에서 물찜질을 받았는데, 덕분에 걱정했던 다리도 풀린 것 같다. 짜증스런 소음이 날 억지로 운동을 시켜준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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