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고상한 야만인

샌. 2008. 2. 24. 13:20

영화 '부시맨'에서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서 살고 있는부시맨이라는 종족이 나온다. 그들은 문명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원시적 생활을 하지만 전쟁과 싸움을 모르고 평화스럽게 살아간다. 이런 경우를 보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데 문명과 사회 속에서 타락되어 간다는 견해에도 일면 수긍이 간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 등은 문명이 가져다 준 산물이라는 것이다. '고상한 야만인'(Noble Savage)이란 이런 생각을 대변하는 용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란과 관계되는데,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로는 부시맨과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이 보고되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 기근이 원시 부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원시사회다. 나는 인간 본성이 기본적으로 이기심과 탐욕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 유전자에 각인된 원죄와 같다. 한 때는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낭만적인 견해에 기울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국가라는 존재는 필요악이다. 그런 조직과 통제가 있어야 어느 정도 질서가 생긴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추억은 늘 사실을 무지개빛으로 채색하는 마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보다는 과거에 대해 향수를 갖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일생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여명기를 무욕과 천진의 시대로 상상하기 쉽다. 에덴 동산처럼 과거에는 낙원의 시대가 존재했음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분명 그런 시대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부시맨 종족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 하나 때문에 시기와 다툼이 생겨났듯이 말이다. 한 번 촉발된 갈등과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단계로 접어드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그러하더라도 고상한 야만인은 결코 폐기될 수 없는 이상이다. 그 이유는 체제와 국가에 의해서 자행되는 폭력이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은 폭력을 잡으려다가 더 큰 폭력을 불러온 꼴에 다름 아니다. 또한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비인간화를 재촉한다는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들고 추구하는 것들이 결국은 인간에게 덫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 세상이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고상한 야만인에 대한 향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난폭한 질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새로운 자연 복귀 운동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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