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고향집에서 빈둥거리다

샌. 2007. 12. 25. 15:40

나흘간의 연휴를 고향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졸리면 자고, 책 보고 싶으면 책을 읽고, 그냥 멀뚱히 누워있기도 하고, 나로서는 최대의 사치를 누린 셈이었다. 빈둥거린다는 것은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현대의 생활 법칙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일하기보다는 빈둥거리기를 좋아한다면 이 경제 체제는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 상상을 즐기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껏 게으름을 부려 보았다.

 



세상이 아무리변했다고 해도그래도 아직 시골 마을은 정으로 얽힌 공동체다.시골 사람들의 화법은 도시와는 다르다. 시골에는 아직 도시와는 다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영위해왔던 생활방식이고 사고방식이다.그러나 시골의 노인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전통적 의미의 정은 박물관의 유물로나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전통을 체험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고향 냄새, 고향 맛, 고향의 소리 등 고향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허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고향에서는 쇠락해가는 모든 것과 만난다. 예전의 밝고 싱싱했던 것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거나 생기를 잃었다. 사람들도 노쇠해져서 아프고외롭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외롭고 불쌍하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으랴. 무지하고 허망된 것에 집착하는 우리 모두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함께 나에 대한 연민은 나름대로 위안이 된다. 쓸쓸하고 허망한 것에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자. 인생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마음을 놓으니 편안해진다. 인생살이는 불쌍한 사람들끼리 온기를 나누며 따스히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뒷산에서 해놓으신 땔감을 톱으로 켰다. 몸을 안 움직였더니 작은 나무인데도 톱질하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 나무들을 가지런히 쌓아놓으신 어머니의 정성이 저 나무더미에는 들어있다. 어머니는 집안 일보다 바깥 일에 훨씬 더 능력을 보이신다. 부엌 살림살이는 엉망이지만 농사일은 남자 몇 몫을 하신다. 아마 남자로 태어나셨더라면 한 가닥 하셨을 것이다.그런 어머니가 싫을 때도 많았다. 세심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가 그리울 때도 많았다.

 



정신을 놓으신 외할머니는 밤낮없이 사람을 기다린다. 누군가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 하신다. 방에서도 늘 이렇게 창 밖만 내다보며 사람을 기다린다. "왜 집에 사람이 하나도 없노?" 늘 입에 달고 계시는 말이다. 외할머니의 일생을 돌아보면 왜 그러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어 마음이 아프다. 치매에 걸리면 정신이 있었을 때 가장 집착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체념(諦念)이란 말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체념은 결코 소극적이거나 패배주의적인 말이 아니다. 체념은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순리대로 살려는 마음, 자연의 질서에 동화되고픈 마음이 체념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덕이다. 그러므로 체념은 덕에 가깝다.

 

나흘간 대문 밖 출입도 없이 그저 집안에서만 지냈다. 고향에만 내려가면 마치 친정에 온 여인네처럼 아무 생각없이 그저 푹 쉬고만 싶어진다. 이런 나를 고향 친구들은 무척 서운해 한다. 아무래도 이건 어찌할 수 없는 나만의 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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