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콘스탄티누스의 비극

샌. 2007. 7. 2. 13:55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13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야기다.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콘스탄티누스 시대는 무척 중요한데, 이 시기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니케아 공의회로 지금과 같은 기독교의 틀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인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은인으로 여기며 12사도 다음의 성인으로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콘스탄티누스 개인에 대해서는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욕에 사로잡힌 잔인한 측면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렇지 못했다면 대제국의 황제 노릇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인이라는 인물들의 행태가 대부분 다 그러했지만 말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 장인과 처남과 매제를 차례로 살해한다. 아무리 근친 사이라 해도 권력을 건 투쟁에서는 모두가 적이고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점은 서기 326년에 당시 부제(副帝)였던 아들 크리스푸스를 체포해서 고문 끝에 처형한 일이었다.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 전처의 아들로 로마 제국의 2인자였으며 후계자로 지목되어 있었다. 그리고 능력도 탁월하여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승리의 전공도 많이 세웠다. 이때의 죄목이 황후 파우스타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파우스타는 크리스푸스의 계모였다. 크리스푸스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잔혹한 고문 끝에 29세의 생을 마쳤고, 콘스탄티누스의 아내였던 황후 역시 목욕탕에서 살해당했다. 발표는 목욕탕에서의 단순 사망사고라고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파우스타 황후는 권력 투쟁으로 남편에 의해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고, 결국은 자신마저 남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대로 계부와 의붓아들 사이에 정말로 사랑이 싹텄는지, 아니면 둘 다 콘스탄티누스의 냉혹한 정략에 희생되었는지 진상을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비극적인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사건 후 콘스탄티누스는 곧바로 자신과 파우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카이사르’로 임명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그의 제국 유지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일신교인 기독교를 통해 황제의 지위가 신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것이라는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배의 도구로서 기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교활하게도 그 자신은 기독교로의 귀의를 미루다가 죽기 직전에야 세례를 받았다.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에서 보면 대죄가 될 게 뻔한 나쁜 행위도 현세에서는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독교도가 되기 위한 세례를 미룬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가장 기독교적인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죽기 직전에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는 것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의 진흥을 위한 온갖 시책을 폈던 그도 막상 세례를 받는 것은 뒤로 미루었다. 그것은 자신의 보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한 인간으로서의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그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기독교 전파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만약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교리 싸움에 몰두하다가 지역 종교의 하나로 사멸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서기 313년 6월에 공표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역사적인 ‘밀라노 칙령’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부터 우리 두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각자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우리 두 사람이 통치하는 제국 서방에서는 이미 기독교도에 대해서도 신앙을 인정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데 필요한 제의를 거행하는 자유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묵인 상태가 실제로 법률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우리의 이런 생각도 실제로는 사문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제 콘스탄티누스와 정제 리키니우스는 제국이 안고 있는 수많은 과제를 의논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만난 이 기회에 모든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기독교도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자에게도 각자가 원하는 신을 믿을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 신이 무엇이든, 통치자인 황제와 그 신하인 백성에게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준다면 인정해야 마땅하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신하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최선의 정책이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결단을 내린 이상, 지금까지 발령된 기독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기독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기독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을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훼손당하는 일이 많았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특히 몰수당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에서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밀라노 칙령이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회담 결과 나온 공동 작품이라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당시 로마 제국의 서와 동을 맡고 있던 두 명의 황제들이었다. 후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이 칙령의 내용이 기독교를 국교로 한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 대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에 받는 특별한 혜택을 보면 기독교를 옹호하는 것이 주목적이기는 하다. 그런데 칙령의 내용이 유럽에서 18 세기에 들어서야 볼 수 있는 관용과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혜택을 받았던 기독교가 후에는 왜 그렇게 잔인한 종교 탄압과 이단 배척의 주역이 되었는지 슬픈 일이다. 인간 갈등과 민족 문제에 종교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렇게 잔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콘스탄티누스가 세계사에 남긴 족적은 그에게 대제(大帝)라는 호칭이 붙었듯 대단한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가족사는 불행하기 그지없다. 당시에는 근친살해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리고 황제가 되려는 자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한다지만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친족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형한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세례를 받으며 과연 어떤 심정에 잠겼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회한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기독교 공인도 오직 로마 제국의 유지를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보인 생전의 어두운 행적들은 그 뒤의 기독교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 하다. 박해를 벗어나서 승리한 기독교는 그 뒤에 다른 이교도들에 대해서 자신들이 받았던 것보다 더 가혹한 박해의 칼을 빼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국가 기득권층의 종교로 굳어진 뒤에 일신교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업보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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