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탓인지 나는 책선물을 받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내가 선물을 할 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책을 주로 한다. 그만큼 책이 주고받기에 무난하기도 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좋아할 수 있는 선물이다. 받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서 책을 골라야겠지만 그 과정도 다른 물건에 비하여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책선물은 다른 것에 비해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수십 년 전에 받았건만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을 보면 그 사람과 그때의 정황이 선명히 떠오른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내가 준 책을 보관하고 있다면 가끔씩 나를 기억해낼 것이다.
내가 선물 받은 책 중에 특이한 경우가 있었다. K가 생뚱맞게도 '마키야벨리'를 선물한 것이다. K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냐며 측은한 듯 쳐다 보았었다. 아마 K는 마키야벨리적 기질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K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바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책을 전혀 읽지 못하고 그냥 책장에 놓어 두었다. '마키야벨리'는 선물 받은 책 중에 유일하게 보지 못한 책이 되고 말았다.
중국의 이종오(李宗吾)라는 사람이 주장한 후흑론(厚黑論)이 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면후흑심(面厚黑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낯짝이 두껍고 도둑놈 심보를 가져야 나라를 통치할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소위 영웅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을 분석해 보면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다. 승자가 되기위해서는 온갖 권모술수에도 능해야 하고, 인정이나 도덕은 헌신짝처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군주론'을 쓴 마키야벨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윤리적 무감각과 덕을 가장한 위장술만이 군주의 영광을 보상한다고 했다.
생존과 정복이 최대의 목표일 때 후흑론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론이다. 지금까지의 인간 역사 진행도 그런 원리에 따라 움직여 왔다. 그럼에도 거기에 내가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원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전자를 무시하며 후자를 따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슬픈 것은 후흑론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가 아니라 세상이 온통 후흑론을 신봉하는 무리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선을 앞둔 정치판의 인간들이야 이미 포기한 바이지만 일반 민중들마저 이젠 자신들도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에 후흑론의 교도들로 변해가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국민이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은 흑심이나 일반인들의가면이나 질적인 차이는 없다. 절제나 공생의 가치는 사라져가고,경쟁과 무한욕망의 철면피들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안들었으면 좋을 것 같은 '무능한 대통령 보다는 부패해도 유능한 대통령이 낫다'는 의식 또한 전세계적인 경쟁의 장에서 우리만 도태될지 모른다는 본능적 우려에서 나온 생각일지도 모른다. 개인이고 국가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면후흑심이 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들은 이런 약육강식의 경쟁의 이전투구에서 파생된 것이다. 사회 모든 현장에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가치들은 점점 실종되고 있다. 양심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로 치부하는 세상이 이미 되어 버렸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가속화되어 간다면 우리에게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후흑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론이 나와야만 한다. 이론이나 철학이 없어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냐마는 그래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천둥 같은 소리가 자꾸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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