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예수와 기독교

샌. 2007. 1. 8. 16:35

네루는 감옥에 있으면서 딸에게 편지글 형식으로 세계사에 대한 얘기를 써보냈다. 마치 옆에 있는 딸에게 얘기하듯 대화체로 쓴 글이 '세계사 편력'이다.멀리 있는딸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인생관을 심어주며 인도 독립을 위한 전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완역본이 나와있는데 세 권의 책으로 된적지 않은 분량이다. 세계사 편력은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세계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세워주는 추천할 만한 책이다.

그 내용 중에 예수와 기독교의 형성에 대해서 설명한 글이 있다. 열세 살 된 딸에게 쓴 글이니 쉽고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기독교의 핵심과 문제점은 모두 지적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 성서(Bible)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너도 얼마간 알고 있겠지. 복음서(Gospels)에는 그리스도의 소년 시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나 갈릴리에서 설고를 하고, 나이 서른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왔다. 이윽고 그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중앙 아시아 일대와 카슈미르, 라다카,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예수가 그 근처를 여행한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가 인도를 방문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단언할 수 없지만, 예수의 생애를 연구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들은 예수가 인도나 중앙 아시아에 간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근거도 없다. 이 시대에 인도의 대학, 특히 서부의 타크샤실라 대학에는 먼 나라에서 열성적인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도 지식을 찾아 그리로 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석가모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예수가 불교에 정통하고 있었다는 일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하기야 불교가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는 인도에 오지 않고서도 어렵지 않게 불교를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종교는 어느 여학생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격렬한 대립과 투쟁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종교의 기원을 서로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각 종교의 모습이나 교리는 서로 매우 비슷한데도 어째서 사람들은 하찮은 문제에 연연하며 싸우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런데 최초의 교의에 여러 가지가 덧붙여지고 왜곡되어 나중에는 본래의 뜻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소견이 좁고 도량이 작은 자들이 성직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종교는 가끔 정치나 제국주의의 시녀로 추락했다. 대중의 이익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기 위해 미신을 조장한 것은 옛날 로마의 정책이었다. 백성들이 미신을 숭상하면 할수록 그만큼 억압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고상한 철학을 즐겨 떠들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이로운 것이 곧 대중에게 이로운 것도 아니었고, 종교란 그저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뒷날 ‘군주론’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종교는 통치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특히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지지하는 것은 통치자의 의무”라고 서술하고 있다. 최근에 제국주의가 종교의 옷을 입과 나타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종교의 대중들의 아편’이라고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도 그다지 놀라울 일이 못된다.


예수는 유태인이었다. 그리고 유태인은 예로부터 유달리 끈기 있는 민족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영화를 누린 짧은 한때가 지난 뒤 그들은 불행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실 그들이 누린 영화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태인들은 과거를 공상 속에서 미화하며 황금시대로 채색했고, 유태인이 다시 강대해질 약속된 날이 오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지만 언제나 단결했으며, 머지않아 한 사람의 구세주가 나타나 영광스러운 시대로 이끌어 주리라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조국도 피난처도 없이 모진 박해와 학대를 참아 가며 때로는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2000년이 넘도록 계속 단결해 왔다는 것은 역사상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


구세주를 손꼽아 기다리던 유태인들은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실망하고 말았다. 예수는 당시의 환경이나 사회 질서에 어긋나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The아 냈다. 특히 그는 종교를 일정한 의식이나 행사의 문제로 왜곡하는 부자나 위선자들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부귀와 영화를 약속하기보다는 어떤 희미하고 신비스러운 천국을 위해서는 그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재물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우화나 설화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했지만 타고난 반역자였으며, 현실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뜯어고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그에게 반대해 그를 당시 그 곳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당국에 넘겼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종교에 관한 한 편협하지는 않았다. 로마 제국은 모든 종교를 인정했으며 누가 여러 신들 가운데 어느 한 신을 욕하거나 저주했다고 해서 처벌하는 일은 없었다. 황제 티베리우스는 “신들이 모욕을 당했다면 그 처리는 신들 자신에게 맡기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도 예수를 종교적인 면에서 탓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정치적인 반역자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유태인이 볼 때는 사회적인 반역자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는 재판을 받고 죄인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때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들조차 그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 제자들의 이러한 배신 때문에 예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리하여 죽어 가는 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이 묘한 감동을 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는 한창 젊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겨우 서른 안팎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말로 쓰인 복음서에서 그의 죽음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고 감동을 받는다.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몇 백만의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은 좀처럼 따르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만은 우러렀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팔레스타인 이외의 고장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마 사람들은 예수를 전혀 몰랐으며, 그에게 사형을 내린 빌라도까지도 이 사건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들도 위협을 느끼자 스승을 외면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를 만나 본 적도 없는 바울(Paul)이 스스로 기독교의 교의라고 생각한 바를 널리 전도하기 시작했다. 바울이 전도한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다. 바울은 박식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예수와 같은 반항아는 아니었다. 어쨌든 바울은 성공을 거두어 기독교는 점점 널리 펴져 갔다. 당초에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도들을 유태인의 일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사뭇 전투적이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종교를 적대시하고 황제의 초상에 절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모습, 그들이 느낀 대로 말하자면 그 편협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을 호전적이고 교양이 없으며 인류의 진보에 반대하는 삐뚤어진 작자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종교로서는 그들을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었지만 황제의 초상에 절하기를 거부한다면 정치적인 범죄자이며 사형에 처해야 마땅했다. 기독교도들은 또한 검투사 노예들의 혈투를 즐기는 것을 몹시 비난했다. 이리하여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그들의 몸은 사자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너는 기독교의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았을 것이며 영화에서도 보았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커다란 목적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면 아무도 그의 뜻 또는 그가 대표하는 목적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 제국의 탄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려 4세기에 이르는 항쟁 끝에 승리는 결국 기독교도에게 돌아갔다. 한 로마 황제는 스스로 기독교도가 되어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기독교가 발전하는 동안 예수의 신격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불타 석가모니가 스스로 신격을 주장하지 않았는데도 뒷날 신으로서, 또 아바타르(Avatar)로서 숭배 받게 된 것이 생각난다. 석가모니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자신의 신격을 주장하지 않았다. 물론 신의 아들인 동시에 인간의아들이라고 거듭 고백했는데, 이 말은 꼭 신격이나 초인격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한데 인간이란 위대한 인물을 신성시하며 가르침에 따르기는 싫어하는 반면 그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은 좋아하기 마련이다. 이로부터 600년 후에 예언자 마호메트가 또 다른 종교를 세웠지만, 이러한 선례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그는 자기는 인간이며 신은 아니라고 거듭 분명히 말했다.


어쨌든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따르려고도 하지 않고서 그저 예수의 신격과 삼위일체설(the Trinity)을 놓고 논란과 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이단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박해를 가하고 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중모음 하나를 놓고 교파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종파에서는 Homo-ousion이라는 말을 기도문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다른 종파에서는 Homoi-ousion이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이 차이점이 예수의 신격에 관계되어 있었다. 이 중모음을 에워싸고 격렬한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도살되었다.


이 내분은 교회가 세력을 확립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극히 최근까지 서양에서는 여러 종파들 사이에 이런 싸움이 계속되었다. 기독교가 유럽에 전도되기 훨씬 전, 그러니까 아직 로마에서도 이단으로 금지된 종교였을 때 인도에 기독교가 전해졌다면 너는 깜짝 놀라겠지. 그러나 예수가 죽은 뒤 100년 후에 기독교의 전도단이 바다를 건너 남부 인도에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정중한 대접을 받았고 또한 그들의 새로운 신앙을 전도하는 것도 허용 받았다. 이리하여 그들은 많은 사람을 기독교로 귀의시켰으며, 그 후예들은 이런저런 운명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도 그곳에 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오늘날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파에 속하며, 그 중 어떤 것은 현재 소아시아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기독교는 오늘날 유럽의 여러 국민들이 믿는 유력한 종교이므로 정치면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쨌든 비폭력, 살생 금지, 사회 질서의 개혁을 주장했던 반항아 예수와 그의 신자임을 소리 높여 내세우면서 제국주의와 전쟁, 배금사상으로 치닫는 자들을 비교해 보면 기이하다.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과 현대 유럽 및 미국의 기독교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니! 오늘날 신자로 자처하는 수많은 유럽인들보다 간디가 훨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이는 전혀 놀랄 일도 못 된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네루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그것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영국이 바로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식민 지배를 하는 영국인들의 행태에서 기독교 정신을 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 숫자는 많지만 예수의 말씀을 따르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닐 것이다.

네루의 비판을 기독교인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늘 있어온 것일 수도 있지만지금의 교회는 예배와 기복과 형식에 치우치고, 사회 정의보다는 개인주의적 구원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지금의 기독교인들 행태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기독교가 새로워지고 사람들에게생명의 샘물이 되기 위해서는 이 간극을 좁히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네루의 말대로 비폭력, 사회 질서의 개혁을 주장했던 반항아 예수와 그의 신자임을 내세우면서 제국주의와 전쟁, 배금사상으로 치닫는 자들을 비교해 보면 기이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더욱 발흥하고 있는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 어디에서 예수의 한 단면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도 본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믿고 있으니 정말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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