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정의를 위한 주님의 기도

샌. 2006. 9. 5. 09:06

자선 행위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라면 사회 정의는 그 구조를 변화시켜 지나치게 빵을 많이 갖는 사람도, 빵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만연히 이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자선 행위라면 구체적으로 인종 차별을 다루는 것이 사회 정의이다. 전쟁의 피해자들을 돕는 것이 자선 행위라면 전쟁을 유발하는 궁극적 요인을 지닌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 사회 정의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유도하는 것이 자선이라면 가난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정의다.


제도적 이해가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개인으로서 살 수 있다(교회에 잘 나가고 기도하며, 친절하고 정직하게, 부드럽고 너그러운 대인 관계를 유지하며).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잘 살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나 정치적 지원, 경제적 공론을 통해 또는 투자나 단순한 소비 성향으로 인해 자선이나 정의, 기도, 윤리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지원할 수 있다. 때로 그것이 우리에게 편한 생활을 약속할지도 모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은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지만 누군가가 폭행당하는 상황을 합법화하거나 후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교회 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불공정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라면 더 이상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매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제도에 대해 단지 잘 몰랐다는 이유로 그 탓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의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불리하게 혹은 유리하게 만드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풍토, 종교적 제도들을 바꾸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제도 자체를 검토하고 제도에 도전하며 힘을 모아 거부해야 한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며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세상에 내재한 윤리적 힘에 의해 그 근본이 바뀔 때 가능하다. 그 세상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정의롭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윤리적이고 보편적인 마음 속 깊이 정의가 호소하는, 모든 사람이 기꺼이 살고자 하는 세상이다. 이념이나 십자군 전쟁 같은 명분에 의한 활동, 분노나 죄의식에서 비롯된 대의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실천하려는 열의는 정의 자체를 진리의 원천, 즉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으로 보는 데서 흘러나와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인품과 하느님 안에 근거할 때만 우리는 세상에 정의롭고 새로운 질서를 제공하는 올바른 비전과 에너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힘은 누구도, 어떤 것도 지배하지 않는다. 그 힘은 말없이 있으며 깊은 영성과 윤리를 바탕으로 한다.... 하느님은 그 힘을 어떻게 보여 주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힘을 느낄 수 있는가? 물리적 힘에 압도당해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 뺨을 얻어맞았는데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느낄 것이다.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힘껏 노력했는데 희망을 보이지 않고 꿈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스스로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느끼신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열정을 쏟은 일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자괴감을 느낄 때, 선하고 옳은 행동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고 욕을 먹고 해명하는데 무력함을 느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느끼신 것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애썼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해 주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하느님께서 느끼신 대로 우리도 느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이상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으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음을 느낄 때, 이 세상에서 소외되는 자신을 느낄 때 하느님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광란에 휩싸인 군중 가운데 홀로 버려져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느낄 때, 집단 강간 같은 악행 앞에서 아픔을 느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느끼신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 금요일에 예수님이 느끼신 것을 당신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결코 힘이 넘치는 분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은 완력이나 속도, 육체적 매력이나 명민함이 아니며 ‘그래, 하느님은 계셔!’라는 탄식이 나오는 기막힌 은총 같은 우아함도 아니다. 세상의 힘은 그런 식이지만 하느님의 힘은 벙어리 같고 무력하고 부끄러움과 소외를 느낀다. 하느님의 힘은 더 깊은 궁극적 토대에서 나오며 결국 부드럽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권선징악의 영화 같은 것이 아니다. 정의와 평화를 지지하는 하느님은 아무도 때려눕히지 않으신다. 설령 꼭 그래야 할 때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약자생존의 법칙이 통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약한 사람의 편에 계시므로 우리는 그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하늘은 모든 것이 역전되는 곳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는 첫째가 되는 곳이다. 모두가 좋은 결말을 얻으며 모든 일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은 약하고 힘없고 가난하고 버림받고 아프고 늙고 어린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하신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과 희생된 사람들, 일과에 지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마땅히 인정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방법과 기준이 우리의 방법이나 기준과 같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웃을 아픔을 보지 않으려는 이기심에서 저희를 구하시어 당신의 이름에 존경을 드리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우리의 필요나 아픔의 치유를 넘어 세상을 재조성하기 위해, 정의와 사랑을 부드럽게 실천하고 아버지와 함께 겸손하게 전진해 나가기 위해 도움을 청해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아버지께 우리의 자유의지를 활짝 열어 그 생명이 혈관을 타고 흐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와의 완전한 상호의존으로 우리가 하는 봉사가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사랑,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같게 해야 한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우리가 짓는 모든 것은 세상의 건축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의 건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늘나라의 기쁨과 우아함과 부드러움과 정의가 드러나야 한다.


오늘

내일이 아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로 미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게으름을 변명하게 되고, 불의 앞에서 정당화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을

모든 사람들이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음식과 깨끗한 물과 공기, 적절한 건강과 교육이다. 우리가 쓰고 남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저희에게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좁은 의미의 우리가 아닌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주님의 선물을 저희 모두에게 똑같이 주소서!


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사랑을 포함해 모든 것을 언제나 선물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시 주어야 한다. 그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건강이 그들에게 내주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중심적 태도와 인종이나 성에 대한 차별, 그리고 제 걱정에만 치우치는 성향을 용서하소서. 매일 저녁 뉴스의 사건, 사고를 들으면서도 아무 것도 안 하는 저희 무능함을 용서하소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를 기만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고 저희가 부드럽고 원만한 정신을 살아 세월이 흘러도 원한을 품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특히 결점이 있는 부모와 상처를 입히고 저주하고 무시하는 제도나 조직도 평정을 유지하게 도와주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며 아픈 사람을 방문했는지, 그것만으로 저희를 심판하지 마소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제도를 개선하려고 했는지, 그것만으로 판단하지 마소서!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온전히 살 수 없기에 용서를 구하며 각자 나름대로 이기심과 제도를 개선할 더 많은 날들을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점점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점점 손해를 보는 익명의 제도[악]가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 계속 참여하는 소경 같은 생활에서 우리는 구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아멘.

- from '聖과 性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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