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km를 달려 대전까지 간 것은 루오(G. Rouault)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조르주 루오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루오는 예수를 비롯한 종교화와 사회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을 많이 그렸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미제레레’ 연작 등 종교성 짙은 그림들과 루오가 사랑한 광대, 매춘부, 가난한 사람들의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정물화와 풍경화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루오는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에서 영혼의 빛을 발견했다. 대신에 부자들과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멸시했다. 판사들, 오페라 극장의 귀빈석에 앉아있는 부르주아들의 얼굴은 탐욕스럽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그려져 있다. 대신에 곡마단 소녀의 얼굴은 예수의 얼굴을 닮아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울 수밖에 없지만, 두터운 검은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전에 나는 화사하고 밝은 그림들을 좋아했다. 특히 르노아르의 그림이 좋았는데 세상 걱정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상류층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단골 소재였다. 루오는 어떤 면에서는 르노아르와 대척점에 있는 화가다. 그는 삶의 또 다른 본질인 고통, 부조리, 숭고함의 의미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제 나는 루오가 좋다. 르노아르에서는 뭔가 경박하고 속물적인 냄새가 나지만, 루오에서는 진지함과 고뇌, 약자에 대한 연민, 성스러움에 대한 동경 등 정신적 깊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비천한 삶에서 삶의 존엄함을 발견한다.
이번 전시 작품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있던 ‘예수 그리스도(수난)’이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해 입체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그의 말년의 작품인데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낮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갔기에 가장 고귀하게 될 수 있었던 성스러운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분은 하늘 높이 외따로 계신 분이 아니라,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분이셨다.
루오를 소개하는 DVD 화면에는 이런 루오의 말이 소개된다. “인간이 고귀한 것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고귀함의 정점에 있다.”
관람을 마치고 옆에 있는 한밭수목원에 잠시 들려본 후 대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2 년만의 연락이었는데 뜻밖에도 친구가 그간 중병으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치료차 서울에 올 때 만나자고 했지만, 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다. 돌아오는 길이 무척 우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