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무대공포증

샌. 2006. 8. 28. 13:04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떨리고 두렵다. 특히 부담이 되는 자리라던가, 시끌시끌한 오락성의 자리일수록 더한 편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하얘져서 마음에 담은 얘기조차 제대로 전할 수 없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향은 있겠지만 나에게는 정도가 심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두 사람과는 서로 교감하며 대화 나누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괜히 무언가가 불편하고 스스로 의기소침해져 버린다.


내 유년과 소년 시절을 돌아보면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나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일찍 학교에 가서 한글이나 깨우치라면서 초등학교에 가입학을 시키셨다. 당시에는 보통 여덟 살이 되어서 입학했는데, 아홉 살 되는 아이도 많았고 심지어 열두 살짜리도 일학년에 입학했었다. 그런데 한글을 배우는 것이 다른 아이들에 뒤지지 않자 아버지는 그냥 정식 입학으로 바꾸고 이학년으로 진급시켜 버렸다. 그 덕분에 나는 동기 중에 가장 어린 나이가 되었고 한두 살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 되었다. 어린 아이 때 한 살이 다른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렇지 않아도 키도 작고 성격도 유약한 아이가 한두 살 더 많은 아이들과 같이 지낼 때 못 따라가는 점들이 많았을 것이다. 무엇을 하고 놀든 주도적으로 해 본 기억이 없다. 그저 다른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며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주눅이 덜 든 것은 유일하게 학업 성적만은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해 일찍 입학한 것이 주된 원인은 아니겠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없고, 내성적이며 말이 없는 아이로 변하고 있었다. 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했는데 작은 키와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놀림을 자주 받았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때는 무척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말이 더욱 없어지고 소극적으로 되었다. 아마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나를 말없고 얌전한 학생으로 기억할 것이다.


무대공포증은 나를 사색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든 것 같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고, 글짓기도 좋아하고 상도 여러 번 받았다. 단속적이었긴 하지만 일기도 꾸준히 썼는데 지금은 옛 일기장들이 모두 사라져 아쉽기만 하다. 글짓기에서 마지막 받은 상은 중학교 때의 백일장이었다. 시 부문에서 입상을 해서 조회 때 연단에 나가 상을 받았는데 다른 무엇보다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지는 못했다. 정신적 성숙이 따라주지를 못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같은 학년 아이들에 비해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두세 해는 뒤처져 있었던 것 같다.


무대공포증을 만든 원인의 또 하나는 음치와 몸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어릴 때는 이것 때문에 엄청나게 고민을 많이 했다. 남 앞에 나서기가 싫고 두려운 원인이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지목을 받아 노래를 부르라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좋다고 웃어대면 더욱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많이 노력도 해 보았지만 타고난 한계가 있어선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포기를 했고, 또 나이가 드니 유흥 자리도 드물고 해서 전처럼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지만 가끔씩 괴로운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마이크, 노래방과 관광버스다. 노래에 얽힌 과거의 슬픈 기억들이 내 속에는 많이 저장되어 있다. 수학여행을 갔을 때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이면 아픈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와 빨리 자리가 파하길 기다리기도 했다.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음치라는 사실을 남한테 다시 확인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한창 예민했던 소년 시절에 내 자학과 열등감의 제일 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음악시간이었다. 물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음악이었는데, 그날은 실기시험을 보게 되었다. 한 사람씩 나가서 테스트를 받는데 나는 몇 번을 시켜도 안 되니까 선생님은 화가 났는지 마구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이놈의 새끼가 시험을 보는데 연습도 안 해 왔다는 것이었다. 연습은 사실 누구보다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질이 받쳐주지 않는데 연습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그때만큼 실감한 적은 없었다. 뺨을 맞고는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 점수만 깎으면 되었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릴 필요가 있었는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젊은 음악선생님이 야속하게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내 무대공포증은 연원이 깊은 셈이다. 고소공포증을 이해하기 힘들듯 모르는 사람들은 뭘 그렇게 까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른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말 못할 고통을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못된 이 친구는 내 진로라든가 사회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일종의 악순환이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역시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스스로 만든 굴레일 수도 있겠는데 그것 역시 나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전체와 연결된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단점을 드러내서 자랑할 용기까지는 없다. 그러나 전에는 내가 못나고 미웠지만 이젠 부족한 내 자신이 밉거나 싫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하늘이 내려준 자신의 몫만큼 충실히 살면 되는 것이다. 속 상처를 갖고 있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잘나고 못난 인생이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모든 인생은 다 똑 같은 가치로 소중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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