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6)

샌. 2006. 8. 18. 13:23


아버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선 엄하고 무섭다는 것이다. 내 기억창고에는 대부분 이처럼 부정적인 것들이 저장되어 있다. 고맙고 좋았던 일도 많았을 텐데 왜 그런 것들은 지워지고 아픈 이미지들만 남아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자식 사랑이 유별하셨다는데 장남인 나에게는 늘 엄한 아버지로 각인되어 있다. 십 년 아래인 막내는 아버지의 사랑을 귀찮을 정도로 듬뿍 받고 자랐다. 약주라도 드시고 퇴근하신 날이면 막내는 도망가고 아버지는 쫓아다니는 숨바꼭질을 즐기셨다. 그런 것이 우리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기대가 엄청나게 높으셨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 내 책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날 저녁 집 분위기는 냉동고로 변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멀리 철길을 넘어오는 아버지의 자전거가 보이면 나에게 사인을 보내주셨고 나는 교과서 아무 데나 펼쳐들고 큰 소리로 읽어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놈, 책 읽는 소리 봐라.”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자식에 대한 이런 공부 집착은 당신의 뼈아픈 어린 시절 때문이라고 어머니가 종종 말씀 하셨다. 아버지는 집안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하셨다. 당신이 못 하신 공부에의 열정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자식에게는 돈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쓰라림을 대물림해 주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동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셨다. 면사무소에 나가시는 틈틈이 지으시는 농사가 다른 집보다도 많았으니 땅은 자꾸 불어나서 나중에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까지 되었다.


당시에 ‘또뽑기’라는 과자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통째로 사다놓고 내가 책 한 단원을 읽을 때마다 또뽑기를 뽑게 하셨다. 아버지 나름대로의 당근책이었다. 매일 저녁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훈련시키셨다. 멀리서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 옆에서 또뽑기를 뽑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물론 사시사철 그렇게 공부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아버지셨으니 자식에게는 엄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런 아버지가 무서웠다. 어릴 때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는데 아버지 옆에서 누워 잘 때는 괜히 주눅이 들고 무서워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다. 등은 가려운데 긁지도 못하고 참느라고 애썼던 슬픈 기억이 난다.


공부에 관한 것이라면 아버지는 어떤 희생도 마다 않으셨다. 다른 데서는 구두쇠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돈을 아끼셨지만 책을 사는 등 공부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0 km 정도 떨어진 읍내의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등하교 시간이 길어 공부를 못한다고 읍에 방을 얻어서 외할머니가 밥을 해주면서 따로 살게 하셨다. 그런 특혜를 받은 것은 동기들 중 나 하나밖에 없었다.


대신에 나태한 모습을 보이거나 성적이 좋지 않으면 혹독하게 꾸중을 들었다. 매 맞은 기억은 별로 없지만 혼이 난 것은 대부분이 그런 것 때문이었다. 읍내에 따로 살 때 아버지가 불시에 오실 때가 제일 무서웠다. 만약 그때 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의 나에게는 가장 큰 스트레스고 불만이었다. 고등학교는 서울에 진학했는데 방학이 되어 고향집에 내려왔을 때였다. 아버지는 마루에 서 계시다가 성적표를 받아보시고는 그대로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빨래장대를 뽑아들고 때리려고 달려오셨다. 부리나케 이웃집으로 도망을 가서 나는 다음날에야 살금살금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신에 기대 이상으로 성적이 좋을 때는 온 집안 분위기가 동시에 밝아졌다. 다행히 그런 경우가 야단맞는 경우보다 더 많았다. 성적이 올라간 것보다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모습이 나에게는 더 기뻤다. 그렇게도 장남의 성적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가 목표를 이루었다고 여기셨는지 둘째부터는 성적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으셨다. 물론 다섯 형제가 모두 서울로 유학을 와 공부를 했는데 동생들은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내가 공부를 잘 하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지만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내가 커서는 자식에게 절대로 공부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을까.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껏 지킨 셈이다. 우리 아이들은 나한테서 공부에 대해서는 아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다른 쪽으로 분명 불만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싫은 아버지 상을 내 자식에게 똑 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이들도 나를 굉장히 무서워하고 어려워한다.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는가 보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을 그렇게 엄하게 키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들은 불공정하게 자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 부모들은 공정하게 키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유전자적으로 제일 가까운 관계가 부모 자식 간인데 거기에도 갈등이라고 부를 정도의 의식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사진은 아버지와 같이 낙산해수욕장에 갔을 때 의상대 앞에서 찍은 것이다. 1968년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 동네 이장들 수십 명이 동해안으로 여행을 갔는데 아버지가 나를 데려가신 것이다. 아이는 나 혼자였다. 밤에 어른들은 밖으로 놀러나가고 동해안 어느 여관방에 혼자 남아있던 기억도 난다.


이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에게도 이런 면이 있으셨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 이미지로는 어른들 모임에 자식을 데려갈 정도로 자상한 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입시 준비에 고생한다고 바닷바람이나 쐬주려고 다른 사람들 눈치를 무릎 쓰고 같이 데려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런 고마움이 분명 많이 있었으련만 지금 기억으로는 남아있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커서야 부모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다고 누가 말했지만 그럴 나이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옆에 계시지 않는다. 허심탄회하게 아버지와 얘기를 나눠보지 못한 것이 지금은 늘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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