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톨릭 신자다. 10년 전에 영세를 받았고 지금도 매주일 미사에 참례하니 겉모습은 신자의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판공성사 같은 기본적인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니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사이비 가톨릭 신자다. 가톨릭의 기본 교리에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개신교를 포함해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습에도 부정적이며 비판적이다. 그런데도 신자의 흉내를 내는 것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것은 현재의 기독교 모습과 일부 종교 지도자들, 또는 믿는 자들의 이중성 때문이지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는 아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점점 보수화해 가고 민중으로부터 멀어지는데 일조하고 있는 가톨릭 지도자들의 언행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무척 조심스럽다. 나 또한 그런 비난의 화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인, 특히 종교 지도자의 말은 사회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용기를 내어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내 비판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나 교리에 대한 비판은 일종의 금기사항에 속한다. 그런 말을 하면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고, 어떨 때는 신성모독의 중죄를 짓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나는 개인이든 무슨 조직이든 스스로 성숙하고 발전해 나가는데 알짬 되는 요소는 ‘자기 부정’이라고 믿고 있다. 종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자기 부정이 없는 종교는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며, 그 종교 초기의 순수성을 잃게 된다. 유입해 들어오는 오염 물질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자기 부정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종교 비판의 당위성을 찾는다. 나는 결코 반기독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기독교가 참 종교 자리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톨릭 교리들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교리들은 나에게 늘 걸림돌로 작용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수도자로 계시는 분과 상담도 해 보았지만 도리어 서로 간에 오해만 생기게 되었다. 그분이 바라는 것은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데 나의 고민이 있다.
첫째,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복에 의해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다.심하게는 화학적 성분까지 변화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된다. 즉 성찬례는 성경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충실히 따르는 의식이 된다. 그러나 성체를 모시면서 이것이 실제 예수님의 살이라고 믿는 신자가 과연 얼마나 될는지는 의문이다. 성찬례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고 한들 종교심에 하등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 열심인 가톨릭 신자의 경우 매일 성체를 받아 모시니 아마 지금쯤은 온 몸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해 있어야 옳다. 그러나 맨 날 그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사실이 아니라 상징이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내 속에서 체화하느냐에 달려있다. 도리어 상징성이 직설적인 것 보다는 종교적 신비감을 더욱 고양시킬 수 있다. 아내를 따라 처음 미사에 참석했을 때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이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 할 때였다. 그 말에 가톨릭 진리의 전체가 녹아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전례 중 그 말을 들으면 가슴이 떨려온다. 종교가 말하는 진리는 신비다. 인간이 그것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 신비는 종교적 의식 등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대신에 너무 구체성을 띌 때 신비감은 사라진다. 나에게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한다는 교리가 그러하다.
둘째, 사제를 통해서 죄를 고백하고 사함 받는 고백성사의 교리다. 이 부분에서 나는 개신교의 관점에 동의한다. 우리들 모두는 내부에 신성이 빛나고 있다. 신은 내 안에 거하신다. 우리들은 신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그분의 아들들이다. 물론 사제의 충고나 조언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치게 권위적이 되어 있고 형식화 되어 있다는 말이다. 어쩌다 주일 미사에 빠지고 고백성사를 보지 않으면 심각하게 죄의식에 시달리는 신자들이 아직도 많다. 주일 미사에 불참하는 것은 대죄이고, 이것은 많은 신자들에게 고백성사의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 죄에서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 예수님인데 어떤 교리는 죄를 만들어서 신자들을 그 굴레에 빠지게 한다. 사실은 죄는 없다고 공표해야 맞는 말이다. 예수에 의한 대속의 교리 또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을 진실 되게 믿는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죄는 모두 사라졌다고 해야 된다. 그 사람에게서는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어야 된다. 자유인이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예수님은 일을 저지를 때마다 찾아와서 고백성사를 보고 해결해 주는 그런 분은 아니시다. 나는 몇 년째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거리낌 없이 미사에 나가 앉아있는 나를 보고 아내는 신기해한다. 아무리 봐도 나는 사이비 가톨릭 신자다.
셋째, 성모마리아 승천교리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은 가톨릭의 성모마리아 숭배가 지나치게 발전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성모마리아의 위치가 대단히 높게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해서 모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성모마리아 숭배는 역사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강화되어 온 것 같다. 그것이 결국 성모마리아가 육신의 죽음을 겪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승천교리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 교리가 인정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혀 성서적이지도 않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신앙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종교의 알짬이야 변하지 않겠지만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시대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케케묵은 중세적 냄새가 난다.
넷째, 원죄와 십자가를 통한 속죄 교리, 그리고 사후의 연옥과 천당의 개념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르침 그대로 믿는 편도 아니다. 나로서는 원죄(原罪) 보다는 원복(原福) 쪽에 더 끌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논리 또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 해석은 바울신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연옥의 개념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이 더 솔직하지 않을까. 다행히 천당과 지옥에 대한 강조는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다섯째, 교리는 아니지만 교황으로부터 출발하는 가톨릭의 계급구조도 하루 빨리 타파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톨릭 서열 구조, 바티칸의 화려한 의식들이 왠지 어색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그런 경직된 조직은 자연스레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며 남성중심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맨 꼭대기에 교황이 있는데 아직도 일부 교인들은 교황의 무오류성을 믿기도 한다. 여성 사제의 선출 요구에 바티칸은 자물쇠로 일관하고 있다. 유럽은 성당과 수도원이 텅텅 비어 관광객들만 찾아들고 있지만 아직도 가톨릭의 실권을 잡고 있는 것은 서구의 추기경 그룹이다. 정치, 경제판과 마찬가지로 제 3세계의 목소리는 미약하기만 하다. 언젠가는 여성 교황이 선출되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바라건대 가톨릭이 스스로 발 빠르게 변화하며 시대를 앞서나가기를 바란다.
기독교의 진리독점주의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 시절 교회에 다닐 때 목사는 기독교를 종교의 범주에 넣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종교 이상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믿는 교회에만 있다. 감리교단의 어느 교수님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불교는 우상숭배에 불과하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오직 기독교 전교의 마당이다. 아마 이런 견해는 아직도 현재의 기독교인들 상당수의 생각일 것이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목사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있다. 인류 역사 발전을 보면 과학,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주의적 관점이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변화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석기시대 유물인 진리독점주의는 버릴 때가 되었다. 내 믿음만이 진짜고 다른 것은 가짜라는 생각은 관점을 조금만 달리 해 보아도 금방 허위가 들통 난다. 그런 잘못된 믿음 때문에 역사상으로 종교에 의해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는가. 과거까지 갈 필요 없이 현재의 세계정세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진리독점주의는 결코 참이지도 않고 세계 평화를 이루지도 못한다. 세계의 처참한 분쟁 지역이 묘하게도 그런 진리독점주의자들이 살고 있는 땅이다. 아무리 좋은 이즘이라도 그것이 절대적이 될 때 이미 조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고 다른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이념은 죄악이다. 마오이즘이나 김일성주의도 정치적으로 나타난 그런 독단적 종교주의에 다름 아니다. 다행히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타종교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이고 있다. 불교와 교류를 하는 모습은 흐뭇하다. 최근에는 개신교와도 대화를 통해 교리상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데에 있다. 이제 닫혔던 교리의 틀에서 벗어나 서로가 열린 자세로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진보이며 발전이다. 통합 종교로 나아가든 아니면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공존하든 미래는 분명 현재의 갈등이 많은 부분 해소될 것이다. 선교의 개념 또한 변해야 한다. 내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더 기독교인답게 진실 되게 살고, 불교도는 더 불교도답게 진실 되게 살고, 이슬람교인은 더 이슬람교인답게 진실 되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교가 되어야 한다. 얼마 전 모 기독교 단체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젊은이 천여 명을 보내어 대규모 선교 활동을 하려다 취소된 적이 있었다. 이젠 이런 공격적 선교는 지양되어야 한다. 가끔 케이블 TV의 개신교 채널을 보는데 소위 잘 나가는 목사들의 당당한 웅변조의 설교를 들으면 내 자신이 주눅이 들고 움츠러들게 된다. 모 목사는 기도를 통해 지난 장맛비도 멈추게 했다고 큰 소리쳤다. 단순하고 유치한 내용들을 세뇌시키듯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믿는 유아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사회에서의 종교 배타성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는데 거기서의 결론 또한 내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 등 종교는 달라고 서로 배타적이라는 데는 똑 같다는 것이다. 어느 분이 ‘개신교는 노골적이고, 가톨릭은 음흉하고, 불교는 은폐적’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속한 가톨릭만 예를 들면, 가톨릭이 종교간 대화를 주도하며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린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사찰을 방문한 지도자가 정작 신부와 신자들에게는 절에 가거나 삼보일배 하는 것을 막는 실정이다. 어느 세미나에서 신부로부터 직접 이런 얘기도 들었다. 가톨릭이 다른 종교와 대화를 하지만 진실한 종교간 대화는 불가능하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한 구실일 뿐 가톨릭에만 진리가 있다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 상층부에서도 이런 인식을 하고 있다면 대화란 기만에 불과하다. 종교들의 이런 공통적인 배타성의 원인에 대해 토론회에서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배타성을 추구하는 종교인의 심리를 왕따 당하는 학생과 비교하며, 자신이 왕따 당할까봐 두려운 아이들이 다른 한 아이를 골라 왕따 시키는 것처럼 심리적 두려움이 큰 종교인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배타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또 신자들을 묶어두고 현혹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배타적인 전략을 구사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한 분은 이렇게 질문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죽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분인데, 그리스도교가 다른 사람과 다른 종교를 희생시켜서 자기만 살려는 종교가 되고 말았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한국 교회의 또 다른 문제점은 역사와 사회의식의 빈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복신앙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교회란 세속의 욕구를 더 잘 충족시키기 위한 위안소며 기원장소다. 교인들을 나무랄 것 없이 교회 자체가 그런 식으로 교인들을 유도한다. 한국 교회에 예수가 있을까? 이 질문은 수시로 나타나서 나를 괴롭힌다. 한국 교회는 자본주의 정치, 경제 체제에 예속되어 그 과실을 따먹으며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불의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에 다름 아니다. 아파트, 땅 투기가 나라를 휩쓸고 강남 사람들이 몇 억씩 불로소득을 챙겨도 교회가 자성이나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썩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을 주도해 이끌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소득의 불균형,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정하는데 교회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 강단에서 나오는 설교의 주제는 가난이어야 하고, 교회는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중세의 성채와 같은 예배당을 지어 놓고 부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장로를 차지하고 앉아 거들먹거리는 꼴은 썩은 세상의 재판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 격동기에 바른 소리를 내어야 하는 교회는 대개 침묵했다. 일제로부터 해방과 동족 사이의 전쟁, 4.19 혁명과 군사 쿠데타가 있었을 때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골방에 숨어 기도만 하고 있었던가? 우리가 과거의 실상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처신에 대한 거울로 삼기 위함이다.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나마 7, 80년대 민주화운동 때 가톨릭에서 바른 목소리를 내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지금 이 시대도 분명 역사적 격랑기이다. 점점 더해지는 세속화와 비인간화의 경향, 그리고 무자비한 국제 자본의 침탈로 인해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은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럴 때 교회는 바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시청 앞에 모여 성조기를 흔들며 김정일 타도를 외치는 그런 행태는 말고 말이다. 종교가 정치, 경제 체제에서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종교는 정치, 경제 체제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 가치 판단은 역시 올바른 역사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변할 것이다. 만약 교회가 시대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민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것이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막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종교는 무지한 인민들에게 현실의 눈을 멀게 한다. 그것이 심리적으로는 종교적 위안에 해당될 것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종교는 현실도피적인 기능을 한다. 그것이 기득권층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일일 것이다. 막스 같은 사회개혁가의 눈에 종교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이 말은 지금의 현실에도 역시 타당하다. 교회는 약탈자가 쉽고 안전하게 그리고 합법적으로 약탈을 하도록 도와주는 완충작용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떡고물로 배를 불리고 있다. 심한 표현 같지만 교회는 이런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사회 현실에도 눈을 돌리고, 억눌린 자의 고통의 짐을 함께 지도록 해야 한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안식을 위해 성호나 긋고 뒤치다꺼리나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방호벽이 되어야 한다. 절벽으로 오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 되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
또 하나 한국 교회는 깊이나 진지함이 부족하다. 세계에서 가장 부흥되는 교회가 한국이라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나 종교사상가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세계를 선도하는 신학이나 이론을 우리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종교 관련 문학서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에 비해 교세에서 훨씬 뒤지는 일본은 뛰어난 종교사상가들이 많이 나왔다. 일반 신자들의 작품 또한 훌륭한 것들이 많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교회의 분위기는 너무 감정적이고 표피적이고 어찌 보면 샤머니즘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마디로 내적 성숙함이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오로지 교회가 외적 성장과 팽창에만 매달려온 자업자득의 결과다. 교회는 신자들이 공부하고 비판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장을 만들지 않는다. 내가 젊었을 때 다녔던 교회는 성경공부 자체를 금지했다. 젊은이들이 성경공부 한다면서 엉뚱한 소리들만 해서 믿음이 약해진다는 게 이유였다. 맹신을 강요하는 데서는 영적 깨달음이 없어질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성령 운동이 끼친 해악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제일 좋은 믿음인 양 한때 성령 부흥회가 전국을 휩쓸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가톨릭에서도 그런 운동이 일어나는 것 같이 보인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성 또한 크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종교인의 품성은 성령을 받는다고 한 순간에 달라지지 않는다. 품위 있는 종교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 훈련과 극기의 자기 수양을 쌓아가야 한다. 그런 훈련과 가르침이 교회에는 부족해 보인다. 개신교가 불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침묵과 묵상의 지혜다. 예배는 좀 더 차분하면서 묵상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가톨릭과 불교는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가톨릭 수사나 불교 승려들은 어딘가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종교의 깊이는 내적인 수련과 수양을 통해 소리 없이 얻어지는 것이다. 이 정도 외적 성장을 이룬 한국 교회가 그런 내적 힘을 키우도록 이젠 고민해야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복음화율 몇 퍼센트에 신경 쓰기보다는 기존의 양떼들이라도 제대로 기 르는데 힘썼으면 좋겠다.
기독교인들은 왜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들을까?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경험한 기독교인들의 특성이 이기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도 대체로 그러하다. 장인어른이 교장으로 계실 때 교직원 중에서 기독교인을 제일 싫어하셨다. 하나 같이 말만 많고 협조나 희생이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장인어른도 본인이 그렇게 싫어했던 기독교인이 되셨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돌아가실 때까지 바꾸지 못하셨다. 같은 교인 집단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대체로 기독교인은 사회생활에서 자신이 손해를 입을 수 있는 행위나 자기희생이 필요한 경우에는 뒤로 물러선다. 나도 어릴 때부터 들어온 얘기가 예수쟁이 하면 말만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는 비판이다. 기독교인의 언행불일치는 분명히 반성하고 가야 할 부분이다. 언행불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우리가 종교인을 비판하는 것은 종교인에게 더 높은 윤리적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희생적이고 봉사적이어야 할 기독교인이 말과는 달리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참으로 진지하게 숙고해 보고 싶은 과제다. 추측컨대 교회의 폐쇄성과 믿음 우위의 가르침도 한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 안과 밖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잠재의식이 있는지 모른다. 또는 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생활 보다는 하느님과의 또는 교우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믿음에 비해 행위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 믿음 하나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은 교인의 의무나 행위를 소홀히 여기도록 무의식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 서간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웃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아무리 하느님 사랑에 열심이더라도 절름발이 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좋다는 것을 그 사람의 실생활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지탄할 줄 알아야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말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낮아지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다. 사랑 보다는 차라리 작은 관심, 친절, 배려 같은 말이 더 나을지 모른다. 결국 생활과 실천의 중요성은 현재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자기 버림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 신자의 숫자나 헌금 액수 보다는 가난한 이웃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교회 예산의 상당 부분이 선교자금이 아니라 지역 사회로 돌려져야 한다. 일신의 부나 안락보다는 자기희생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조해야 하고, 신자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기안되어야 한다. 많은 부자 신자들이 떠나더라도 옳은 소리를 외쳐야 한다. 이런 것들은 교회가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할 준비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비록 지금 교회가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안고 있긴 하지만 나는 기독교의 미래를 믿는다.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긴 여정이듯이, 인간이 만든 종교 제도의 단점들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개선되면서 결국은 인간의 영적 진화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하리라는 것에는 의문을 두지 않는다. 아마 먼 훗날 우리의 미래 세대들은 지금 우리들의 행태가 신앙 유아기의 한 과정이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과 하늘이 해결해 줄 것이지만, 다만 개인의 견해는 자유롭게 표출되어야 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미래를 앞당기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해 적다보니 대학교 다닐 때 신앙에 열심이었던 세 명의 친구가 생각난다. 당시 과학 전공이었던 우리 과는 30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세 명이 목사가 되었다. 세 명 모두 전공 공부나 학교생활 보다는 신앙 활동에만 전념했었다. 그런 열정이 있었으니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A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전도하고 나갈 교회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교회가 지금도 악명 높은 - 은혜 충만한(?) - K 교회다. 지금은 외형적으로 세계에서 몇 번째 되는 교회로 되었지만 당시는 가건물에 마룻바닥에서 예배를 드렸었다. 목사의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성향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때는 기독교의 믿음이란 그런 것인 줄만 알았다.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속은 늘 공허했다. A는 현재 대전에서 목회를 한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동기들과는 소식 두절 상태다. B는 네비게이토 소속으로 활동했었다. 여러 명이 종교적 공동생활을 하면서 소유도 공동으로 하는 등 초대교회를 닮으려는 노력이 인상 깊었다. 기성 교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신앙면에서는 아주 열심이었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친구였다. 그들의 집회나 전도 여행에 따라다니기도 했다. B는 지금도 네비게이토 관계 일을 맡아 보고 있다고 듣고 있다. 얼마 전 그의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어 편지를 띄었으나 답신이 오지 않았다. B도 역시 우리 동기들과 전혀 만나지 않고 있다. C는 신념이 강한 친구였는데 그의 꿈대로 아프리카로 갔다. 마찬가지로 그 뒤로는 소식을 모르고 있다. 세 명 모두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심리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세계에 열정을 쏟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 한다. 그러나친구를 만나 옛날 얘기를 나누고픈 마음이 그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병폐를 중심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종교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 보았다. 이것은 내 종교관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로부터 상당한 정신적 자양분을 보급 받았고 동시에 무수한 번민과 고뇌를 겪기도 했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그것들은 모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다만 기존 교회의 가르침과는 아직 상충되는 부분이 많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내 신앙이 흔들리지도 않는다. 사람은 나를 실망시키고 배반하지만 진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사람이나 시스템의 어리석음이 진리 자체를 무효화 시킬 수는 없다. 나는 역사 발전의 진보를 믿는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와 희생을 치르지만 결국 인류는 자유와 평등의 보편 가치에 점점 더 접근해 간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주의 원리이고 하느님의 능력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썼다. 종교에는 인류의 지혜가 담겨있고 영적 개안의 열쇠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현상계 너머의 신비한 그 무엇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성이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신비다. ‘신앙의 신비여!’
그리고 나는 또 묻는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자유며 해방이다. 종교는 우주의 생명을 숨 쉬며 함께 춤추는 것이다. 종교는 회색빛 교리 속에 갇혀있지 않다. 종교는 위의 모든 논쟁을 쓸모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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