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젊은 날의 노트(4)

샌. 2006. 8. 10. 12:29

1977/1/2


저녁,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새

석양 아래 반짝이는 피곤함


1977/1/9


들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은 차라리 내가 그렇게 하고 싶도록 그립다.


1977/1/30


일상의 모든 생활이 가면처럼 보인다. 모든 걸 훌훌 벗어 던지고 나 자신으로 돌아오면 막막한 허허벌판, 거기에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인정에 울고 세상사에 울고 분내던 것, 이 모든 것은 이젠 타버린 재.

석양의 길을 홀로 걸으면 짓눌러오는 세월- 가슴으로 바람이 새 나간다. 유행말로 언제 끝나려나. 사회 공기가 그토록 감미롭게 느껴지지만 어디서나 인간 본연의 모습은 마찬가지겠지. 오늘도 신문엔 화려한 낱말이 사회면을 장식한다. 그 언어의 의미가 왜 사라졌는가. 체험적으로 그걸 느끼려는가. 새로 탄생하려면 옛 것은 버려져야 하는게 옳다면, 새로 탄생하는 기쁨의 고뇌를 위하여 쓰디쓴 이 순간은 참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내일의 태양은 어제의 그것이다. 번잡하고 속세적인 낮이 또 기다린다. 어떻게 그 물결을 거슬려 헤엄칠까. 불가능, 악착같은 고민도 웃음거리뿐. 이 캄캄한 마음과 같이 허무로 되돌아오고 만다.

세수를 한다. 발을 씻는다. 약간 개운해진다. 그러나 또 다른 나는 잊어버린다. 라디오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감탄하고 웃고, 아 인생은 속고 사는 것. 성인, 철학자, 시인, 인생의 완성을 향한 영예로운 명칭이여.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진실한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폭풍우가 휩쓸고 간 그래서 부러진 나무줄기 굴러다니는 모래 흩날리는 먼지, 그 가운데 우뚝 선 나를 응시한다. 나는 서야 한다. 그리고 가야 한다. 마음이 기쁘드라도 성나드라도 차분하더라도 그것을 의지하지 말며 나는 나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한다. 부모님 앞에 사랑하는 아이들 앞에 그리고 내 조국에......


1977/2/6


때 아닌 비가 내리네. 처음엔 싸락눈이 얼굴을 간지리더니 이내 빗방울로 변해 버리는군. 그간 너무 소식이 없었어. 이러다간 이름까지 잊어 버리겠다니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머리서 부터 발끝까지 세면을 하고 나면 그래도 마음은 개운해 지는 편인데 낮의 그 짜증스럽고 답답하기만한 체증에 걸린 듯한 억눌림이 당분간은 싹 가셔버리지. 그렇다고 군 생활이 그런 걸로 일관되고 있다고는 생각지 말게. 그건 큰 오해야. 역시 군대 사회로서의 멋이 있고 배워야 할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네. 아니 생각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고 있지. 사실 이렇게 펜을 들 때면 괜히 기분이 울적하다든가 무엇에든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태반이기 때문에 언제나 쓴다는 것이 이렇게 소위 저질인지도 모르지. 친구야, 우린 같은 인생을 살아가네. 목표하는 바와 생활 방식이야 물론 같을 수 없지만 여기든지 거기든지 그렇게 큰 차이야 나겠는가. 하늘의 별, 아니 내 발 밑의 모래 한 알까지 그 시간의 단위는 수십억 년을 넘고 있네. 캄캄한 어두움 속의 저 별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누군가 말했듯이 천문학을 하는 사람은 현실을 초월한 기개 높은 인생관을 갖게 된다 하지만 나야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그런 경지는 아직 요원한 느낌이네.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이성적 동물이라 지성적이라 떠벌리는 우리가 시간에 이렇게 얽매어 있다는 사실이 아직 우리는 너무나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재삼 깨닫게 해주네.

라디오에선 팝송이 흘러나오고 얼마 남지 않은 기름으로 난로불은 마지막 열기를 내어 뿜고 전등불은 동그랗게 책상 위를 비치고 있네. 나를 기다리는 점호 시간. 이제 라디오를 끄고 난로불을 끄고 전등을 끄고 그리고 자물쇠를 잠그고 내무반으로 내려가야 되네. 기다리지 않는 산간을 기다리며 오늘 일과도 끝이 날걸세.

친구여, 차라리 화려한 단어보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단어들, 이런 말로 얘기하고 이런 삶을 살아가세. 내일 다시 실망할지라도 또 다시 오르려하겠지. 끝내는 못 오를지 몰라도 실패한 인생은 되지 않을 걸세. 왜냐면 외적 조건을 이기려는 내적 노력이 채색된 삶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더 쓰면 공허하기만한 말들만 할 것 같아 이만 그치네. 삶에 대한 친구의 고뇌가 더욱 짙어지길 빌면서.


1977/2/11


갑자기 이렇게 조용해지면 무엇을 할까 도시 마음을 잡을 수가 없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 혼자가 되었을 때 어찌 보면 가장 행복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 행복을 느끼기엔 너무 가슴이 울렁거려 그저 나를 잊어버리고 흐르는 시간을 안타까이 지켜보기만 할 뿐이네. 인상에 남은 여러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본다든지 그저 멍하니 타오르는 난로불을 쳐다본다든지, 일면 바보 같은 행동들이 이 시간을 지배하고 있지.

6개월째 되는 군 생활! 이젠 가끔씩 안 일병님이라는 존칭도 듣지만 아직은 어색하기만한 졸병 생활. 처량하기만한 ‘고향 열차’같은 열외군가가 짙은 호소력을 가지고 이 마음을 적셔주네. 사람의 마음이 여러 겹의 포장으로 가리워져 있다고 본다면 진짜 보물은 무엇일까. 이 포장을 뜯으면 또 다른 포장이 나오고 그러면 나는 다른 느낌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지. 친구야, 어디서나 자신의 생활에 완전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겠지.


1977/2/14


어디든지 통한다는 길에 서서

메마른 나무의 울음을 듣는다

북풍은 나를, 나무를 휩싸며 지나간다

갈 길은 멀고 많은데

들려오는 소리 하나 없다

우주는 마냥 침묵

나의 외침은 메아리 되어 되돌아 올 뿐이다

그래도 한 걸음 내디뎌야 하기에

출발할 결단을

계속할 용기를


1977/2/18


어머님 오늘은 구정입니다. 아침엔 하얀 쌀밥과 소고기국이 그리고 점심땐 특식으로 빵 하나가 나오더군요. 사실 오늘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평범한 하루였읍니다. 오전엔 참모장 순시하고, 내무반 쳥소하러 불려 내려가고, 오후엔 하기식 참가하고 그리고 이렇게 사무실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 전혀 그 즐겁던 구정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란스레 보도하는 신문 기사가 먼 나라의 이야기같이 요원하게 느껴지는군요. 지금 고향엔 포근한 연기가 온 마을을 감돌고 거기서 생활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머님, 매일 매일 웃고 삽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눈 오면 눈 쓸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비 오면 또 그래서 귀찮아하고 잘 대접해 주면 좋아서 웃음 짓고 홀로 되면 처량해 하고...

어머님, 나에겐 주어진 삶은 이런게 아니란 걸 뻔히 알면서도 자연스레 호흡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미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물의 하나하나, 발밑에 밟히는 풀 한포기, 모래 한 알에서도 자연의 은총을 알고 감사하고픈 그 지순한 감정이 이젠 돌아올순 없는 걸까요.

군대 생활이란 나 자신의 수련기이요, 나를 키우는 단련기라고 입대 전 황홀히 그리던 때가 이젠 망각의 그늘에 가리워져 버렸는지 치졸한 졸병 생활에 만족하며 흘러가는 날자를 헤아리는 바보가 되어 버렸읍니다.

어머님, 나에게 힘을 주세요. 만족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모든 것을 배척할 수 있는 튼튼한 나의 성을 쌓고 싶습니다. 어머님 곧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땐 그리운 어머님을 볼 수 있겠지요. 정말로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진실히 그 땐 어머님을 볼 것입니다.


1977/2/19


군대 와서 는 것은 담배(10개비⇒20)와 몸무게(52kg->60) 뿐.


1977/2/28


오늘 편지 받아 보았네. 매일 만나 볼 날을 기대했었는데 벌써 귀대해 있다니 무척 섭섭하네. 이젠 봄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는군. 길을 가는데 밟히는 땅이 녹기 시작하여 물기가 촉촉이 스며있더군. 언젠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썼었는데 그 봄이 발에 밟히니 그동안 지구도 참 많이 돌았는가보지.

얼마 전 서울 나가서 만나볼 양으로 여러 친구들에게 연락했었네. 동시에 자네 소식을 물었지만 하나같이 모른다하고. 광표는 해군 장교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하면 곧 입대할 것 같더구만.

또한 몸담고 있던 학교를 오랫간만에 찾아 갔었네. 왜 전에 말한 우리 동기 생물과의 한 선생 있지. 그 미스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와 결혼했다는 빅뉴스를 들었네.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날 밤 술을 주고받으며 인생은 심각하지도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절절이 느꼈네. 누구의 시에서처럼 삶이란 잡지의 표지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인가 보지.

해가 기울고 하루 일과를 마감할 시간이네.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북적대는 종로거리, 그리고 자네와 어깨를 나란히 걸었던 충청도 그 플라타너스 길을 지워버리며 군인으로서의 생활의 의의를 찾도록 노력하는게 나의 길이 아닌가 생각해보네.

벗이여 건투를 비네. 아마 휴가를 마치고 며칠간은 부대 생활 꽤 어려웠겠지. 하루하루를 멋있고 아름답게 꾸며 나가세.

‘인내와 노력,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다. 인내야 말로 환희에 이르는 문이다’ -안나콥스-


1977/3/3


바람 소리가 가슴을 더욱 썰렁하게 한다. 수첩을 뒤적이면 과거 지나온 시간들이 손가락 끝에 접혀 넘어온다. 한 많은 시간들이라면 역시 그런 것. 그러나 금방 이 나의 위치로 다시 돌아오면 남은 긴 세월이 온 몸을 짓누른다. 단지 흘러가는 의미로서가 아닌 헤치고 나가야 할 그 시간들이.... 상상은 공간을 뛰어넘어, 따스한 봄 날 천체의 모형이 있다. 당구공과 보일 듯 말 듯한 모래알. 뿌듯한 가슴. 그러나 여기는 연병장이다. 아이들 장난 같은 제식 훈련 시간 그 무리에 지어 좌우로 돈다. 기고 넘어지고 흙 묻은 옷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이리 이를 물어야 하나.

한 잔의 막걸리. 그러면 잊고 말 안해도 갈증이 풀릴 것 같다. 그 날이면 난 또 평범한 인간으로 맹맹히 발걸음을 돌릴까. 자유, 죽음, 조국.

귀대하던 버스 속, 술내음과 섞여서 새겨들은 군생활은 무조건 즐겁게-×나게 ×하고, ×나게 ×하고-그러면 흘러가리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과 내가 흐르는 것. 한 단계 생각을 높이면 모든 걸 잊은 듯 바라볼 수 있을게다. 옛 성현들의 행적이 나를 더욱 고무시키고 저 무한의 공간이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지. 노력하는 하루, 최선을 다한 하루.


1977/3/5


김 선생, 전에 내가 찾았을 때 바둑을 두고 있었오. 몇 몇 아이들이 남아서 이상스레 쳐다보던 그 때, 낯선 숙직실서 선생의 얼굴을 봤을 때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잊을 수 없구료. 여전하시던 선생, 한 때는 아니 지금도 그 독특한 생활 태도로 존경하고 있는 선생에게 이리 나의 넋두리를 늘어놓소. 선생은 군생활을 면제받고 지금은 해외 이민길에 오른다는 소문이 들리오. 아마 당연한 선생의 길이겠지.

작년 겨울이던가요. 노장 선생님들과 외국 생활에 관하여 열나게 토론하던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오. 아마 선생의 매력은 남들과는 다른 사고방식 그게 아니겠소. 일본 가요의 녹음테이프를 나에게 틀어주며 역겨운 말을 했어도 그게 선생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었오. 이제 나는 군생활 초년병. 푸른 제복으로 선생을 찾았을 때 그 반기던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하오. 그리곤 한 선생건을 맨 먼저 가르쳐 주었지. 아이구야하는 유행적 반복어엔 너털웃음으로 응수해 주던 선생이 생생이 떠오르오.

김 선생, 그땐 사실 차라도 나누며 얘기하고 싶었었소. 이젠 휴가 갈 때 다시 만나볼 수 있을는지. 선생과 만나면 잡다한 얘기는 다 필요 없을 거요. 졸병 생활이 어떻고 군대가 어떻고 난 이렇고 넌 이렇다, 이런 얘기는 사실 선생에게만은 꺼낼 필요도 없을 듯 하오. 선생! 나에게 주소를 물어서 내가 알으켜 주었지. 사실 소식이 기대가 되오.

그리고 한 가지 기억나는 것, 입대 전날 같이 출근하면서 한 말이 또한 생각나오. “군에 가면 지금 애들하고 같이 아웅다웅 속 썩이는 것 보단 훨씬 나을 거다” 내 대답 “예스”. 또 그날 마지막 다방에서 “군에 가면 고생이 되더라도 공병대 같은데 가서 한 가지 기술을 배우라” 내 대답 “예스”. 사실 선생은 군생활을 하지 않았었오. 그 땐 경험 무였던 나와 의견 일치였는데 막상 푸른 제복을 입고 있는 현재의 입장으로선 약간 비현실적이지 않나 생각이 되오. 그러나 그런 게 바로 선생의 장점이 아니겠소.

오늘은 토요일 오후, 홍 상병님과 진으로 한 잔하고 이렇게 기분은 둥- 떠 있오. 모든 잡다한 생각에서 해방되는게 그리 좋을 수 없구료. 일상생활, 티끌 같은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며 바쁘게 뛰고 하던 그 생활이 지금은 우스이 아니 군생활 전체가 우스이 나아가 인생 자체도 우스이 생각되는게 바로 지금이오. 그러나 이게 영원할 수 없고 또 잠시뿐. 사람의 삶이란게 참 허무하단 느낌이오.

우주적으로 볼 때 그렇게 고독해 보이는 인류-- 망망한 암흑의 공간에 표류하는 듯한 돌보는 이 없는 버려진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이리 악착스레 살고 있는지 멍해지기만 하오.

김 선생, 술 한 잔 놓고 얘기하고 싶소. 그럴 시간이 꼭 오리라. 지금 이 시간도 나라는 인간이 귀중스레 느껴지오. 비굴과 자학에 빠져선 안 된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며.


1977/3/7


나는 꿈을 꾼다. 소박하면서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즐거운 꿈을. 미래 그 어느 날 우리의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마련될 때 거기는 산 새 우짖는 그런 아침, 저녁이 되리라. 아니 조그마한 읍이라도 괜찮겠지. 도시 내음이 배이지 않은 그런 마을에. 나의 학교 역시 작고 아담한 곳, 하나의 과학실 거기서 연구하고 배우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탐구해야지. 소박한 아이도 좋고 얄미운 아이도 좋고 배은망덕한 아이도 좋고 그 땐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할거야. 저녁은 우리들의 시간, 사면이 책으로 장식된 우리의 방에서-응접실, 거실, 식당도 겸하는-둥근 테이블에 마주앉아 해도 끝없는 얘기를 나누겠지. 빚지지 않는 적당한 살림으로 종교는 없을지 몰라도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며 세속을 멀리하고 우린 안에서 밖에서 평범한 인간의 길을 걸으려 노력하겠지. 난 또한 그녀의 테니스를 아끼면서...


1977/3/11


난로가 꺼진 사무실은 싸늘하기만 하다. 생활의 자신을 주체하기 힘든 어려움이 왁 밀려온다. 군대란 집단에서 그 특이성 때문에 아직도 적응되지 못한 여파인지 거울에 비치는 꺼칠한 모습이 처량해 보여 쓰려온다. 그것이 또한 견딜 수 없는 인간 본래의 허망 속으로 연결되어 의식은 공간 가운데로 흩어지고 만다. 만나자. 부등켜 우는 한이 있어도 만나자. 격랑 속에서 표류하는 난파선같이 기대할 수 없는 하늘에 매달리는 마음.


우리가 아직도 혈기 왕성한 젊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1977/3/13


가장 이기기 어려운 적은 나 자신이다.


1977/4/6


그럴듯한 옛 잡지를 뒤적이노라면 짧은 단편에서나마 내 생활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된다. 빨리 흘러보내고픈 이 시간들이지만 생에 대한 엄숙성과 책임감이 나를 엄습할 때면 일말이나마 위안을 느끼고 좀 더 충실해지자고 다짐한다. 사실 그것이라고 별건 아니다. 현재에 대한 생활 태도가 무어냐에 따라 그 생활의 윤택도는 달라지는 것이니 비관적이며 적당주의의 생활관을 버리고 좀 더 긍정적이며 정직한 생활 태도를 갖는다는 것-즉 성실해져야겠다는 것-이런 마음가짐이 든다는 것이다. 특히 군생활에서 내일 일은 예측하기 힘든 것, 오늘 하루 실패했더라도 중심은 인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자만감으로 채워진 저녁을 갖고 싶은 것이겠다.

친구에게 「성실은 인간 최고의 덕이다」라고 편지했을 때 그 말은 지금의 나에겐 너무 무겁게만 들린다고 응신해 왔었는데, 그러나 친구여 보답 받지 못하는 조직체라고 우리 자신까지 버릴 필요야 없지 않은가?

여튼 삶이란 지순한 성스러움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개스실에서 포로수용소에서 기록을 통하여 대할 수 있는 그 삶의 거룩함, 인간 생명의 성스러움이여. 그 삶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현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다짐한다.


1977/4/19


떠남을 생각할 때면 지난 일들을 추억하게 되고 어디에서나 연민의 정이 느낌을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곤 생활에 대한 자신의 진실성 여부를 반성해 보게 되고 조그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무지개로 채색된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지나온 시간들.

이젠 어디 가도 두렵지 않으리. 나에게 많은 것을 알으켜준 과거에 감사하며 작은 귀염둥이 선물이라도 주고 떠나고픈 심정이다. 운명이라면 운명의 신께 감사하며 의지를 부여해준 그 뜻대로 앞길을 개척해 나가리.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직립 동물로서 가야할 길이기에. 만약 그 때 순간적인 후회도 없다면 더욱 감사해야겠지.


1977/5/10


경희야. 벌써 여름이 가까이 온 것 같구나. 불어오는 바람 속엔 뜨거운 내음을 조금은 맛볼 수 있구나. 그동안 학업에 충실하며 할머니 모시고 잘 있겠지. 전번에 갔을 땐 다정히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오빠랍시고 이름뿐인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할머님도 어디 편찮으신데 없이 안녕하시겠지. 가끔씩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할머님과 너희들을 생각한다. 내내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할 할머니, 그리고 저 하늘같이 넓고도 맑게 자라가는 너희들이 되기를 빌어본단다.

경희야. 반 아이들과 생활하는데 혹시 어려움이라도 없느냐. 이 오빠는 남다른 어려움을 이긴 경희가 더 잘 할 줄 알고 있지만. 며칠 전 신문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인간의 참다운 가치는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자기 삶을 지켜 나가는데 있다. 삶의 책임은 자기 자신만이 져야한다.

경희야. 더욱 마음을 넓게 가지고 할머니와 부모님이 요구하시는게 무언지도 생각해 보렴. 잘하면 얼마 안 있어 만나 보겠지. 그 땐 우리 환하게 웃으며 만나 보도록 하자.

안녕. 오빠가.


1977/5/14


까뮈가 말했던가, 부조리한 인간이란 영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원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사람의 생활은 특히나 현대에 있어서 얼마나 무익한 반복의 연속이냐. 혹자는 현대인의 자아 상실이니 톱니바퀴 인간이니 하며 현대의 가치상실을 개탄하고 있다. 마치 시계의 작은 부속이 하나 빠졌어도 바늘이 움직이듯 인간의 가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시지프스마냥 주어진 운명-찾아볼 수 없는 개성, 대가없는 노동-에 대한 무익한 복종뿐.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결론내리길 그래도 시지프스는 정상을 향한 투쟁이 있으니 행복하다고 썼다. 여기서 신의 상실이 무슨 문제랴.

인간의 첫소리부터가 고업을 짊어짐에 대한 고통의 소리던가. 그 때부터 그에게는 짓누르는 바위덩이와 씨름할 운명이라고 하면.....

그러나, 희망 미래를 향한 인간의 소망은 부조리를 극복한다. 그의 고업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그의 생활은 희미하나마 빛을 찾게 된다. 시간을 초월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운명의 짐을 벗을 수 있다. 우주의 빛이 그의 내부에서 타오른 것이다.


1977/5/17


조용하기만 한 화요일 오후다. 오랫간만에 옛 두 편지를 뒤적이다. 거기에는 쓴 이의 감정이 그대로 배이어 있어 만지는 것만으로도 마치 마주 대하는 것 같이 흐뭇해지기만 한다. 지금 소식이 끊어진 것은 대수롭지 않다. 흘러간 과거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었기에 뭐랄까 드물게 느껴보는 따스한 교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조잡한 인간간의 조잡한 대인관계에서나마 번갯불 같은 순간의 충격 그것을 맛본다는 건 역시 즐겁다. 신은 그런데서나마 영원을 맛보게 했을까.

지금 먼 곳 가보고 싶은 거기선 벗들 또한 웃으며 탄식하며 잘들 살아가겠지. 난 과거에서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인간의 귀엽기만한 순수함을 발견하곤 울고 싶도록 즐거워한다. 또한 나에게 새로운 힘이 되고 이 세계는 그래도 덜 추하게 보이게 되고.

편지, 어린 시절, 미래, 이런데서 삶의 반짝이는 환희를 맛보며 그것은 나의 길의 감로수들이다.


1977/5/21


아카시아 꽃잎이 마당을 덮었다. 한 때는 그 향기에 취해 비틀거릴 정도였는데 오늘 바람에 낙화한 모양은 서설마냥 탄성을 일게 하지만 그래도 쓸쓸한 여운이 맴돈다. 흙이 묻은 풀뿌리의 냄새가 또 좋았다. 하이얀 뿌리를 코에 갖다대면 그 향긋한 후감. 고이 묻어주곤 그 내음을 그리 그리워했다. 밖을 내다보면 지금도 흰 아카시아 꽃잎이 정다운데 야밤중 보초를 오고갈 때 숲을 지나면 마치 동화의 나라로나 끌려 가는 듯 애써 감정을 숨기려 했었다.

자연은 저리도 아름답고 현실은 이리도 매마른데 별을 좇는 나의 마음은 제자리만 돌고 있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도록 다가온 휴가.

이해할 수 있는 긍정. 지금도 누군가가 어디에서 소리 없이 일하고 있을, 땀 흘리고 있을 이 시간. 충청도로 전라도로 생각을 옮기며 하늘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기원하자. 저 피안의 세계 그 곳을 지향하며....


1977/5/25


무척 한가하구나.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낙서를 하기도 하고 불안한 잠을 쫓으며 너를 생각하며 또 상상의 세계를 헤매게 된다.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일. 법당 주위엔 등, 만국기가 안개 낀 아침을 울긋불긋 채색하고 있다. 새로이 포르스름한 한복으로 차려입은 할머니가 흰 봉투를 정성스레 잡고 서있다. 한 할머니는 불상 앞에서 연신 손을 모아 무엇인가 기원한다. 바라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경건한 모습. 어릴 때 할머님을 따라 절에도 갔었고 봉투에 이름을 적어주고 대견해 하기도 했었다. 아마 내가 쓴 글씨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장식된다는데 대한 기쁨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군 복무 중 맞는 그 날이다. 애써 느껴보려 하지만.... 매말라진 감정을 탓해야 할까, 난 무엇인가 자꾸 잃고 있는 것만 같다.


1977/7/8


폭우 뒤 잔비가 뿌린다. 하루해가 가는 대공 초번초. 완전한 꿈이었다. 화려함 속에서 지냈던 그 현란한 기억들. 착잡한 마음. 가슴은 눈물이 적신다. 어제의 요란한 오기조차 찾을 길 없고 순진한 눈동자, 눈동자들. 기다리는 것은..... 바라는 것은..... 뛰어봐도 누워봐도 들리는건 싸늘한 황야의 돌풍. ××야------- 그러나 다시 설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삶은 수레를 탈 것이다. 최초의 이 경험 또한 사라지든 되살아나든.....


1977/7/13


귀대했다. 무어라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 자신을 책할 뿐이다. 이해를 바란다. 네가 휴가 귀대 후에 쓴 편지에서 군대 생활 별거 아니다란 귀절을 기억하는데 나로선 자네의 그 담담한 마음을 존경하고프다. 휴가 얘기나 할까? 하여튼 재미있게 보내었다. 많은 사람들과 접촉해 보면서 인간관계의 실상과 허상을 알 듯도 하였다. 근무하던 학교를 찾아갔었는데 나의 어린 친구들 반기며 맞아주더구나. 군대 얘기 해 주느라 애도 먹었지만 달라진 그들의 모습에서 한없는 용기를 발견했었다. J는 신검을 받고 현역 입영 대상이더구나. 근간 입대한다면서 큰소리치는데 그것만은 그 녀석 변하지 않았어. 너 왜 그 아가씨 있었지, 수학과. 결혼했어, 불교학생회장과. 너의 표정을 생각해 보노라면 즐겁기만 하다.

여름이 되니 무척 바쁘지. 그런 중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만을 뺏기지 않도록 다짐하곤 한다. 참 귀대시 작은 책 한 권을 부쳤는데 받아 보았는지? 동기들 대부분이 지금 작게 크게 같이 고생하고 있다. 건강한 여름을 빈다. 만약 청춘사업을 한다면 거기에도 승리 있으라.


1977/7/17


갑자기 천둥과 함께 소나기가 굵게 퍼붓는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빗줄기에서 삶의 영원성을 찾았다는데, 나는 왜 이리 약해질까? 조그만 일에도 두려워지고 불안하고, 앞길에 어떤 험난한 장벽이 있을 때 그걸 뛰어 넘으려는 용기와 오만보다 꺾이고 움츠려드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 큰 소리도 쳐보고 오기도 부려보지만 남는 건 허탈해진 심정뿐, 진정 나를 속일 순 없는가 보다. 기성이와 한 잔하며 그랬다. 이젠 나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리라. 대답 왈 ‘잘 해봐라’. 역시 실속 없는 말이었다. 환경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우선 나 자신이 문제이다. 해 보는 것밖에 없다.

삶이 즐겁지 않느냐? 고통이 또한 아름답지 않느냐? 난 무얼 바라는가?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 내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시간. 그러나 그게 남기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실로 인생의 묘미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데 있는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보는데 있는 것이라면 두려운 마음은 악마의 미소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즐겁게 살라. 통속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자신의 맡은 일을 즐겁게 행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란 뜻으로.

실로 마음가짐 하나 만으로 세상은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비쳐지는 것. 자진하여 해보자. 남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자. 주어진 삶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바보가 되지 말자. 이제 비는 그치고 계절답지 않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든다. 하루해가 저문다. 다시 내일은 밝은 태양이 뜨리라. 어두움을 통해야만 밝은 아침이 오듯 내일을 위한 어두움, 이건 어두움이 아니라 빛의 다른 면이다. 눈을 바로 뜨고 웃으며 살자.


1977/7/18


우리는 하늘을 오른다

우리는 길을 간다

하늘은 끝없이 넓고

길은 영겁의 윤회

돌에 채이는 발걸음이 아플지라도

우리는 가이없이 그저 간다

변신을 기다리며

초인이 되기 위한 희망을 안고

그저 하늘을 보며 넘어지며 걷는다

우리는 하늘을 바란다

우리는 걸어간다

울며 웃으며 고개를 흔들며


1977/8/6


ATT 측정 終了. 30일 가까이- 휴가 귀대 후 CPX에 이어 연속으로 - 애쓴 것은 얼굴에 나타나 있다. 지나고 보니 잡히지도 않을 듯 아스라이 멀어진 먼 망각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 그저 한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보내었는지, 그 장마와 무더위 속을.

안으로, 밖으로-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실망하면서, 한탄스럽지도 않고 환희도 없는 그런 생활. 현실이 꿈이 될 때 뼈아픈 비애를 느낀다.


1977/8/7


가슴으로

비가 나린다

초목은 푸른 환영이 되고

앉은 나무 의자마저 깨어지고 부서지고

사라져간다

비 오는 바다의 망망함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갈 때

등을 돌릴 때

가슴은 호올로

비에 젖는다

옷을 털며 일어선다

대지에 발을 딛고

키스나 할까

앓는 대지에....

밟히는 모래알들에...


1977/8/12


밤 보초 땐 빛나는 별이 좋다고 느꼈다. 졸린 눈 비비고 내무반을 나섰을 때 검은 하늘에 뿌려져 있는 별들에서 힘을 얻으며, 산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려 애썼썼다.

한 날이 저물어가는 어스름이다. 한 가닥 마지막 햇살이 안스럽고 풀, 나뭇잎마저 웬지 울 것만 같다. 一切唯心造. “너 요사이 왜 화가 나 있느냐?” 두 개짜리의 말. 뭐가 뭔지도 모르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 되고. 그저 크게 웃어 봤으면, 울어 봤으면.

야근 후 사무실을 나서니 또 별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 선명함이 어둡던 마음을 밝혀준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아좌, 전갈좌. 그리고 뛰어나게 푸른빛의 밝은 세 별이 이루는 삼각형. 마침 유성이 하늘을 가르며 흐른다. 절로 탄성이 인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보다 더 아름다운게 있을까? 그것만큼 신비한게 또 어디 있을까? 아까 기분이 울적할 때 해질 녘의 하늘을 쳐다봤다. 주위가 밝게 빛나는 구름덩이들을 둘러싼 푸른 대기. 그 때까지의 나의 감정은 초라한 성 마냥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 위대한 자연이여, 우주의 신비여.


나에게 사치스러운 말은 하지마라. 너에겐 어울릴지 모르나.... 사막이다. 메마른 모래 언덕. 용트림도 헛된 몸부림. 다만 또 다른 모래 언덕이 되는 것을.... 거기서 크게 외치는 순례자가 있어, 그의 목소린 우릴 이렇게 슬퍼 지치게 한다.


떠나 갑시다

우리 짐을 챙기고

아름다운 그 고장을 찾으러

거긴 어둠이 오지 않는 곳

초목이 노래하고 산천이 반주하는 그 곳으로


1977/8/14


단 한 번의 손짓에서도

우린 기쁨을 느낀다

거기에 이유 모를 미소가 있다면

우리의 함성은 소동은 너희들과

통한다

그래서 보람을 안는다

빨강, 파랑, 노랑

그 원색의 물결을 바라보며

한탄강에서 차를 세우고

우리는 이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너희들은 그냥 있다

모든 것을 잊은 듯

무관심한 채

그러면 우리의 외침은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떠나는 길

너희들을 지킨다는 한 가닥 긍지를 지니며

식은 땀 훔쳐내며 우리는 달린다


1977/8/15


이 휴일에 별별 꼴 다 보고 겪는다. 군생활이 다 그런 것. 체념조차 메말라 버리고 이 불같은 성질은 어찌 주체할까. 점심 굶고, 저녁 굶고, 몇 조각 빵으로 때우긴 했으나 아 그러나 마음이 고프다.


1977/8/18


잠시나마 가질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두려워지는 건 내 자신이 보여서일까. 낮의 뛰고 소리지르고 애쓴 것들. 그저 허탈해졌던 일들. 썰물처럼 사라져가고 이제 밀려오는 건 없다. 날카로운 생각도 풍성함도 마른 풀더미를 헤치면 구경할 수 있을까. 그저 멍하다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가. 무엇인가 찾아야 되겠지. 아니 마음속에 그 보배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잃지 말자.

1977/8/21


어제는 예상대로 영근이가 면회 왔다. 5시간 이상이나 기다린 끝에 외박증을 끊어서 기성이와 셋이서 동두천행. 짜장으로 저녁 먹고 영화(고교 깡돌이) 보고 막차 시간(9:40)까지 소주로...

동생이 만원을 준다. 오늘 하루 밤 잘 놀겠다. 역시 갈 곳은 뻔한 것. 둘이서 소주 2병을 또 깠을 것이다. 아침 9시. 인생은 다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철학이니 순수니 그런 것 외에 인생엔 그저 지저분하기만 한 것도 있는데, 왜 이런 면에는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지. 남은 돈을 보니 700여원. 커피, 담배, 결국 돌아갈 차비밖에 안 남는다. 전당포 찾았으나 문 닫았고, 홀가분한 심정이라면 맞을까?


1977/8/23


세월이 흘렀는지 내가 흘렀는지 어느덧 4계절의 순환 속에 입대 1년을 맞는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조용하고도 애조띄게 생각키우는 또 다른 나, 그 나를 훌훌 벗어 던지고 뛰어들어 정신없이 흘러간 1년. 모든 것 다 차치하고 우선 나의 감정은 이유모를 쓸쓸함이 말할 수 없는 애잔함이 휩싼다. 분명 잃어버린 무엇의 그리움도 아닌데.

요란스러움에서 떠나고프다. 전우신문의 기사마냥 그 용감무쌍한 단순성에 얽매이지 않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고식적인 도덕성에 뒤따르지 않는 것도 좋다. 비굴한 자신, 왜소해진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는 여유는 아직도 남아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감동할 수 있는 나를 보며 또한 얼마나 감사했는가.

이제 1년 전을 추억하면서 가야할 나의 길에 떳떳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길은 나의 길, 그 누구도 밟아본 적 없는 그 길을 위하여.


1977/8/25


술 한 잔 들어가니 이리 좋다. 오늘은 Y에게서 편지 오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 묘하고도 신비스러운 것. 도시 나를 알 수 없으니. 나는 살고 있다. 한 친구의 말대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한 말이 지당한데... 자랑스러운 나를 창조하고프다. 아니 그것은 노력보다도 간단한 마음먹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입대 2년을 시작하며 정말로 후회 없는 성실한 군생활을 하자고 잠시 다짐해 보는데, 자기 성장을 느낀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일까. 나의 세계를 뺏겨선 안되겠지. 그것이 아집이든, 오만이든 나만이 가질 수 있다. 통속적인 것에 물들지 않게, 소위 개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게---


1977/8/26


아카시아를 보면 생각나는게 있다. 무슨 가슴 설레는 감미로운 추억이 아니라 사나이들의 세계에서 벌어졌던 아카시아와의 전쟁이기에. 작년 이맘때 훈련병 시절, 처음 더블백 매고 잔디 작업부터 시작하여 그 가을날을 6주간 아카시아 잎을 따러 산으로 들로 헤매던 일이 이젠 아카시아만 보면 연상된다. 농으로 “제대하면 아카시아에 대하여 논문이라도 쓸 것 같다” 거의 매일 온 손바닥이 검게 되도록 더블백을 메고 훑어 대었으니 나중에는 아득하게 원정까지하며 그러면서 혼자서 몇 몇 마음 맞는 끼리끼리 해방감을 맛보며 돌아다녔었다. 이동 주부 아줌마들과 즐거운 만남, 조교들과의 숨바꼭질, 집결 후 검사할 때의 조마조마했던 마음, 불합격시의 기합, 가득 아카시아 메고 저녁 길을 뛰어 걸어 귀대하던 일들. 처음 맛 본 도토리의 새큼한 맛, 몰래 사서 나누어 먹은 한 알의 빨간 사과의 단 맛은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1977/8/28


휴일을 맞아 다들 나갔다. 동두천으로, 서울로. 어제 저녁 점호 인원 4명(30명중 26명이 사고다). 말번 보초(인원 부족 탓으로 불침번대신 선 것)를 마치고 사무실에 올라와 법정서 취침. 난 하여튼 누우면 잠이니. 8시 조식. 세수도 못하고 바로 온 탓일까. 한 숟가락 넘기기가 힘이 든다. 지금 식당 수리중이어서 요 며칠간은 마당 식사이다. 차라리 더 나은데 점심의 라면을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먹어두어야겠지.

아침만 되면 신문을 찾아 걸으며 기사를 훑는 흥분감이 좋은데 특히 일요일은 보너스(일요신문)까지 겹쳐 신문을 손에 들면 잔뜩 마음이 부푼다. 좋은 기사가 있으면 메모해 두고 일요신문의 과학란은 가장 애독하는 페이지. 졸무(졸병이 하는 일) 몇 가지만 하면 맑은 이 날 푹 쉴 수 있어 좋겠다. 생각하니 풍성한 시간, 마음까지 풍성하다. 이런 때면 모든 게 좋아지지.

10시경 기성이 올라와서 바둑 신청. 정말 바둑은 오랫만이다. 아마 5개월은 될 듯 싶다. 초전 술내기. 사무실 옆 시원한 그늘에서 마치 신선이나 된 듯, 그러나 불계패. 2차전 음료수내기, 6호승. 3차전 승자는 집백 권리를 부여하기로 하고 피차 열전. 아깝게 종반에 투지 부족이었던 듯 3호패.

따가운 햇살이 무릎을 간지리고 시간은 12시, 늦게 내려가면 생라면을 얻을 수 있다. 아직도 라면의 맛은 그렇게 좋은데 식당에서 쪄주는 라면의 맛을 잃은 건 작년 12월 외박 후 귀대하여 억지로 먹던 그 날부터였지. 경리부 경유하여 어제 대 호주전 축구에서 2:1로 패한 일간스포츠 머릿기사를 본 후 식당에 내려가니 선임하사인 지 상사님이 시계까지 뺏어가며 확인한다. 도착 시간은 1시 1분, 1분 늦은 게 이리 우스운가. 이런데도 아직 찐 라면이 수북하다. 별 수 없지. 몇 숟가락 뜨고 달걀로 위안 삼으며 시계 남겨두고 회관행. 그 뒤 허전한 손목 때문에 시계를 찾느라 잠깐씩 헤맸다. 건망증도 이 정도면 합격권에 들까?

성진은 외출 준비하느라 부산한데 사실 부러운 건 없다. 나가야 그게 그것. 면회 온 민간인들, 몇몇의 아가씨를 포함하여 요란스럽다. 보꾸다이상은 또 한 쪽 구석 관중들 앞에서 전직의 특기를 보이며 요란한 이빨을 들어내고 희희낙낙하는데, 아마 마음속으로는 그 다방 레지에 목 빠지고 있을게다. 이규삼일병과 합류하여 과자와 음료수(술은 날씨 탓으로 보류에 의견 일치) 총 차용액이 900대. 내월은 보너스 있으니 아직은 여유가 있다만 하여튼 군인의 엥겔계수는 아마 100%일거다.

한낮은 아직도 뜨겁다. 이 일병 “훈장 했는데 어찌 면회 오는 학생 하나 없나?” 왈 “사실 반성하고 있다오. 어떻게 훈장을 했길래 지금 이 처지가 되었나하고...” 그런데 일은 지금부터다. 사무실에 올라와 졸무 개시하려는데 벨소리, 받을까 말까. 예감은 틀리고 본부 주번하사(현병장)의 목소리에 흠칫해진다. 거기라면 작업밖에 더 있겠는가. 사실 작업이래야 힘든건 아니다. 그러나 남들은 외출, 외박으로 다 즐기는데 부대에 남은 사람들 무슨 죄가 있다고 작업으로 부려먹어서야, 그러니까 군대 ×같다란 자학적인 욕설이 안 나올 수 없잖은가. 모래 두 트럭 작업. 안 나가겠다. 마음대로 해보라. 빨래감 들고 수도가에 간 것,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헐떡거리며 뛰어 올라오는 현병장과 맞부딪치고 말았다. “너 임마 농담인줄 아나.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치우고 중대에 내려가 있어” 더럽다 더러워, 날씨는 이리 좋은데 무슨 꼬락서니가, 감찰부가 그럴 수가. 비실비실 되올라가는 모습을 누가 본다면 값싼 동정은 하지 말라.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 별 것 아니지 않느냐 싶기도 한데 그 때는 왜 그리 더럽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누구는 즐기고, 누구는 부대에 있어도 터치 못하고, 한 많은 졸병 생활이여 어서 아듀하고 싶구나. (기성은 사무실 감시로 이탈) 내려가서 본부 요원 몇이와 야구하는 동안 모아온 인원이 전부 5명. 모두가 ×쭈구리하다. 그 중 내가 그래도 최고 고참. 아마 어깨에 힘주었었다면 나 자신 더 처량했을지도 모른다.

1트럭 길에 깐 후(신임 사단장의 방치 엄금 조치의 여파가 분명하다) 막간을 내어 회관. 끼리끼리 잘들 마시는데 마침 홍 병장님 만나다. 말년 휴가 어제 복귀했었다. 참모님께 드릴 인삼주 1병 들고 같은 트럭으로 숙소에 나가겠단다. 좋지요. 술을 마신 입에서 이제 조금씩 농담이 풀려 나온다. 나는 한 잔도 안했으니 그건 내가 아니다.

B관사 앞에서 실랑이 끝에 내리다. 오기로라도 끝까지 하고 싶었는데. 벌겋게 술 오른 홍 병장의 태도는 평상시와는 딴판이다. 박 상병님은 컨디션 부조. 오늘은 왜 이리 뜻하지 않은 일만 닥칠까. 모래 싣고 돌아오는 트럭편으로 들어와서 작업 끝나다.

6시가 넘었을 게다. 홍 병장의 후광 탓으로 별 수고 없이 수송부서 식사. 꿀맛이다. 모든게 끝났다. 나의 큰 결점중의 하나인데 감정의 제어가 잘 되지 않는 것, 이것 고치지 않으면 사회생활에 애로사항 있다는 걸 알긴 하는데 자칫 에고이스트 취급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마음은 아직도 꽉 매여 있다.

주번 사관께 야근 통보내고 사무실에 올라와 청소(내일 선임하사 들어오시는데), 빨래, 목욕. 기성이와 함께 몸 씻으며 일소일소 일노일노라, 결국은 나한테 손해라고 이젠 어떤 일에도 느긋하게 생각해야 겠다고 말하다. 또 내일 그 소식 없으면 자살해야겠다느니 하며 약간은 가능성 있는 포상 휴가를 기대해 보고.

사무실에 올라오니 채병장님에게서 전화 오다. 상례적인 그런 거다. 있는데 연병장 영화 상영 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혀 뛰어 내려가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최근의 국산 화기 화력 시범과 갈림길이라는 단편 영화. 차라리 소박하고 단순해서 좋다. 그런 장면에 환성으로 답하는 전우들의 모습이 꾸밈없어 즐겁다.

이제 다시 사무실에 올라 와 이만큼 썼다. 지금 시간? 시계 없어 모르겠다. 자연의 숨소리가 들릴 듯한 밤이다. 누구 말대로 쏟아져 내릴 듯 오늘 밤도 별이 빛날까. 창문을 열어 보자.


1977/8/29


「어떤 때는 조급하게, 어떤 때는 여유 있게 이것은 나의 벗이다.」

나의 내부에 신비한 힘이 잠재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절망에 빠져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세상을 실망하여 한없이 괴로울 때면 어딘지 모르는 깊숙한 곳에서 단 샘물이 솟아올라 나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준다. 육체적으로 몹시 피곤할 때도 한 순간 예기치 못한 기운이 생기고 팔을 뻗으면 생기가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래서 인간은 절망을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일까. 알지 못할 그 힘, 나태와 저주에서 투지와 담담함으로 바꾸어주는 그 힘에 감사한다. 그것은 더 할 수 없는 외로움에 잠길 때 일 순간 나를 깨우는 것이다. 이러한데 앞길에 무슨 두려움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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