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젊은 날의 노트(3)

샌. 2006. 8. 10. 12:24

1973/10/3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가 나의 관심사가 된다는 것은 人生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딴 사람의 각본대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타인의 눈을 살필 필요가 없다. 나의 약점을 감출 필요도 없다. 굳건한 生의 목표를 잡았으면 - 아니 아직 그런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일시적인 행동의 좌표는 있을 것이다 -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속일지라도 나 자신을 배반할 수는 없다. 나는 결국 cynical해져야 한다. heroism을 가져야 한다.

音樂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哲學과 音樂에 미쳐보고 싶구나. 밤새도록 감미로운 音樂에 취해 봤으면....

나는 英雄도 못되고 졸부도 아닌가? 중간 존재란 얼마나 비참한 짓인가? 이왕이면 hero가 되라. hero 중의 hero가 되자. 딴 사람의 콧구멍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라. 그들의 속은 얼마나 虛하며 또한 나는 참으로 實하다고 믿는다. 착각 속에서 사는 生이라면 거대한 착각 속에서 살자! 이 현실은 眞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1973/10/4


우리의 개개 연속적이며 구체적인 認識을 추상적으로 재현하고 추상적이며 항구적인 知識으로 높이는 것이 哲學의 任務이다. 곧 哲學은 世界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을 찾는 學問이랄 수 있다. 베이컨의 말대로 ‘참된 哲學이란 世界 자체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하고 이른바 世界가 구술한 것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世界의 本質은 어두움에 묻혀 있다. 누가 거기에 빛을 비추느냐? 人生은 人間이라는 동물의 한 생존 형식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人間은 동물이라고 불려야 된다는데 모욕감을 느껴야 한다. 人間은 至高善을 바라볼 줄 아는 유일의 存在者가 아닌가? 삶을 아무리 관념화시키고 形而上學的으로 취급하여도 현실세계를 외면할 수 있을까? 理性的 행동이나 思考方式은 경시되고 동물적인 感性에 따른 生의 투쟁의 대열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人間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란 말인가?


1973/10/13


친구여! 生의 의미를 찾으러 나선 나의 친구여! 아스라이 멀어졌던 망각의 기억을 되살리면 나는 한 곡- 애수의 아리아가 되네. 돌고 도는 지구는 무슨 목적으로 돌고 있는가? 거기에 타고 암흑 속을 나는 왜 돌고 있을까? 애달프게 흘러나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처럼 나의 마음은 흐느적거리네. 언젠가 물었었지. “넌 요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곧 내가 가진 사상까지는 못 가도 느끼는 바는 무엇일까 하고 자네는 궁금했을 걸세. 그 땐 째지는 듯한 팝송이 귀를 찢었네만 난 그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네. 대답이 있을 수가 없었지. 지구는 돌고 나는 왜일까? 자네는 나의 떨리는 마음을 아는가? 나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언젠가 말하고 싶었어. 나는 철학과 음악과 사랑에 미치고 싶다고. 칸트를 보면 쇼펜하우어를 보면 나의 마음은 숙연해 지네. 나는 그들 속에 있네.

친구여!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와 내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불가사의한 사실이란 말인가? 친구여! 다음에는 막걸리를 선사하겠네. 한껏 취해서 자네가 되고 싶어. 그래서 하나가 되고 싶어. 生이란 엄숙 이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애 쓴다」 친구여! 우리 좁은 껍질을 깨고 광명의 세계로 나서세. 거기서만이 눈 뜰 수 있는 곳.

현실에 관심을 돌린다는 것에 나는 저주를 하네. 명예를 얻으려고 돈을 위해서 인간으로 태어났단 말인가? 권력을 생각하라고 이성을 부여받았단 말인가? 나는 이런 때가 있었다. 진리의 미망을 찾아 나서는 혼돈된 마음, 미친 상태가- 젊은 시절에는. 나는 멋모르고 울었다. 세상사에 눈을 뜨지 못하고 바보처럼. 아! 그 때 내가 조금이라도 장래를 생각했더라면 그래서 돈도 벌고...친구여! 자네 이렇게 변할 생각인가? 이상을 버리고 현실과 야합하고 싶거든 자살해 버리게. 아직 자네는 이상 속에 살고 있어. 그 점에서 나는 아직도 자네를 친구로 믿네. 현실에는 cynical해져 보세. 대담하게.

친구여! 나는 철학을 배우고 음악을 배웠네. 아름다운 melody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며칠 전부터지. 그리고 나는 거기에 휘말려 들었어. 현실과 진리의 세계, 그 무엇을 말하던 나의 입이 이상하지 않던가? 친구여! 나의 외롭고 불쌍한 이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가? 혼자뿐이다. 나 이외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항가리 환상곡’의 서두 부분이 생각나는가? 소름이 끼치도록 장중하게 가슴을 울려오는 異世界에서 들려오는 듯한 둔탁한 타악기의 음율을- 인간의 마음이란 그렇게 허하다. 왜 우리는 충만해 지려는 진리를 거부해야만 하는가? 현실 자체를 부정함이 마땅한데.

친구여! 모짜르트의 세레나데를 듣고 있으면 짜릿하게 떨려오는 가느다란 감정의 물결을 느끼네. 왜 나의 영혼만이 두 번씩이나 서러와야 하는지. 친구여! 천둥 같은 짜라투스트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대는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을 텐가? 일어나 보자. 진리가 우리를 손짓하고 있네. 그 길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음악까지라도 포기할 작정이네. 친구여! 그러나 음악만이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진실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오직 음악만이... 그래서 음악은 현실의 언어가 아니네. 음악은 저 높은 하늘에서 울려오는 善世界의 쓰레기인가? 쓰레기라도 善世界의 것은 現象界의 어느 것에도 비할 바 없이 고귀하니까. 친구여! 이것이 그대의 이름이네. 친구여, 우리 몽테에뉴의 전설 같은 우정을 넘어선 신화로나 남을 우정을 창조하세나. 그리운 벗이여-

인간 개인의 다양함에 나는 얼마나 놀랐던가? 양극을 사랑했던 나의 지난날은 얼마나 왜소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음극을 사랑하네. 그 모든 것이 한낱 감정의 영상. 이성은 그렇지 않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한 영역을 인간 이성은 제공해 주네. 이성을 통해서만 참다운 인간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자네는 믿지 않겠는가?

친구여! 자네는 사랑의 열기에 빠진 적이 있었지. 그 때가 가장 순수했던 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사랑.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 이외의 또 다른 가치가 존립하고 있다는 말일 걸세. 객관자로서 자네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부러웠네. ‘나의 사랑은 영원이어라/ 나의 사랑은 진실이어라’‘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 같은 사랑을 가졌어라’

친구여! 이젠 나의 사랑을 지켜봐 주게. 그대는 사랑을 현실계의 일부분이라 주장하지 않겠지? 현실은 사랑을 부정하네.

세 가지의 위대한 병에 걸기고 싶단 말일세. 철학과 음악과 사랑과- 저 빛나는 광휘의 진리의 길로- 친구여! 자네는 이제 나의 일부분이네. 자네의 사랑이, 자네의 음악이, 자네의 철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 친구여! 나의 외로운 길에 등불이 되어 주게나.

1973/10/14


펜을 잡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내적 욕망이 뭉클하게 솟아오른다. 아! 自我가 파멸할려면 철저히 파멸하라. 나는 왜 安逸을 바라고 安逸 속에 묻혀 있는가? 現象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동경에 차 있지는 않았던가? 너는 온유함을 바라느냐? 가치 없는 것들은 멸시해 버려라. 나에게도 번개를 달라. 音樂은 번개와 상통할 수 있는가? 音樂이 환각제가 아니기를....

나의 意志는 근거를 요하지 않는 유일의 것. 나의 행위가 어린 아이의 발버둥이 아니기를... 번개와 같은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나에게 그런 사랑을 달라. 위대한 사랑은 사랑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眞理만을 사랑할 뿐이다. 世界는 나의 表象일 뿐, 神도 人間의 表象에 불과하다.

敎會 출석- 너의 행위는 묵과되어서 마땅한가? 나는 아직 낙타일 뿐 사자가 되지 못했다. 시장에서의 孤獨感. 賤民들이여! 너희들은 눈을 떠라. 추잡에서 벗어나라. 나의 친구들이여 그리고 자신이여! 安逸은 賤民을 낳는다. 바싹 긴장하라. 그리고 달려라. 高貴를 찾으러.


이렇게 촛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태초의 적막이 찾아든다. 불꽃의 하늘거림은 외로움에 견디지 못해서인가? 그래 이 불꽃이 다하도록 人生을 찾자. 시간조차 잊어버린 고요한 밤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팔랑거리는 촛불이 나의 마음을 태운다. 영혼의 소리가 들릴 법 하지 않은가?

아! 실로 生은 촛불과 같다. 그것은 자기를 태우면서 일생을 마친다. 한 순간의 콧김으로 사멸해 버릴 연약한 것. 그러나 生 자체는 빛을 발한다. 암흑 속에서 오직 빛만이, 生만이 광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가련한 것.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그것은 몰락해야만 한다. 어떻게 태양에 비할 수가 있으리. 암흑은 태양을 저주한다. 그 암흑에 저주가 있으라.

이런 찬송가가 있다. ‘주는 저 산 밑의 흰 백합화, 나는 새벽별...’ 그렇다. 진리는 숨어있는 흰 백합화, 나는 그것을 찾는 여행가가 되어야 한다. 초는 타 들어간다. 액체가 되고 기체가 되어 영속되는 불꽃을 형성하고... 그리고는 사라진다.


1973/10/16


Mr. Schopenhauer 前

안개 속을 걷고 있었오. 젖빛 속의 迷兒는 파란 뱀을 밟아 버렸소. 그도 역시 뱀에게 발을 물리고 말았소. 지금은 그와 뱀이 나란히 안개 속을 걷고 있소. 迷兒가 뱀에게 말했소. “그대 친구여! 우리 푸르른 강물을 찾으러 달리자” 뱀 曰 “푸른 숲은 나밖에 없다. 너의 푸르름을 나에게서 찾으라!”


「世界는 철두철미 意志와 表象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의 이 命題는 얼마나 魅力的이었던가? 그러나 역시 또 얼마나 난해했던가? 자네는 意志와 表象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겠더군. 나의 物自體를 자네는 意志로 봤네. 그리고 자네는 現象界를 表象에 불과하다고 했지. 자네와 나는 처음부터 의견을 같이하고 들어간 거지. 결국 자네 思想의 핵심은 意志의 無目的性에 있다고 해석했네.

人間 신체나 現象은 동일한 意志가 객관화한 表象에 불과하다. 나는 意志이고 表象일 뿐이다. 자네는 경험적으로 意志와 理念을 만병통치식으로 사용하여 現象을 너무나 잘 설명했네. 허나 자네의 그 특출한 意志가 경험적인 적용을 받는 통에 입은 수많은 상처를 나는 보았네. 意志 자체는 목적도 없고 한계도 없다! 고로 意志의 객관화인 모든 存在는 無目的과 虛無의 惡循環만을 계속한단 말인가?

자네는 또 意志의 동일성이라는 관념하에서 모든 사물의 내적, 외적 합목적성을 추출했네. 그리고 모든 개체에게는 상호 鬪爭을 意志의 본질로 삼았네.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 이러한 순으로 意志의 객관화의 단계는 고급화한다. 가장 단순한 意志의 표현은 일반적 힘으로서 重力이었네. 가장 단순한 형태의 生物 意志는 식물에서 발견할 수 있겠지. 아무 의식도 없이 단지 생장하려는 意志만이 가장 정직하게 표출되고 있으니까. 물론 각 구성 성분도 理念의 부분이지만 그것들은 서로간 내적 합목적성으로 결부되어 있지. 동물의 경우엔 행위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하며 최정점인 人間인 경우는 각 개인의 성격과 理性이라는 무서운 것이 있네.

내가 意志라면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네는 意志를 근거율로 부터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그 원인의 탐구를 부정했지. 물론 意志가 物自體인 이상 당연한 논리겠지. 무조건적이고 목적 없는 意志인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외적 합목적성으로 세계는 새로운 무엇이 창조된다고 변화하지도 않을 것이고 무한의 時空 속에서 지속된다. 단지 나는 意志의 表象일 뿐이다.

幸福이 무슨 소린가? 나는 虛無와 倦怠 속을 헤엄치고 있지 않는가? 生命 자체의 價値조차 부정되고 마는군. 자네를 경탄과 회의의 눈으로 지금 바라보고 있네. 자네에게서 배우기만 한 것이 유감이지만 언젠가는 자네를 깨워 내가 조금만 가르쳐 주겠네.


1973/10/17


나에겐 글을 쓴다는 것이 그 자체 이미지의 창조다. 그것은 철두철미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글 쓰는 일은 중지되어야만 마땅하지 않는가? 이미지는 직관을 통해서만 산출될 수 있으며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문자, 현실의 부호는 단순한 이미지의 전달자로서 과연 적합한가? 문자는 난해성의 독을 품고 있다. 나에겐 철학적 직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의 사색은 모래 위의 누각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니 사색조차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哲人은 고독했다. 나도 고독을 요구한다. 눈은 현상만을 보게 되어 있고 귀는 현실의 소리를 듣게 되어 있다. 나의 감관은 완전히 현실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내적 감관으로서의 직관이 있으며 진리를 바라 볼 수 있는 이성이 있다. 고로 나는 직관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직관을 필요로 한다.

셋의 관계는 무엇인가? 人間, 現象界, 物自體. 세계는 이 셋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人間과 物自體 사이에서 우리는 現象界를 지각하고 있다) 人間과 物自體 사이에 놓인 現象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의 원천으로서 現象이 부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現象은 人間의 진리에 대한 인식의 방해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現象은 物自體를 싸고 있는 포장지에 비유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돌려보자. 人間, 現象界, 物自體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는가? 셋은 독자적으로 타에 의존함이 없이 존재한다고 인정하여 보자. 셋은 병렬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人間은 現象과 마찬가지로 物自體까지도 쳐다보기에 어디 불만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現象은 現象 자체일 뿐이다. 진리는 現象界와는 아무 관계없이 人間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항존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우리는 철두철미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철학이란 인간의 잃어버린 진리를 찾는 길이다.

상실된 眞! 그로부터 인간은 무거운 짐을 걸머진 고행자가 되었다. 이제 그 책임은 現象界에 돌릴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現象은 단순한 現象에 불과할 뿐이며 인간의 진리에 대한 인식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 병렬적 관계에서 인정되고 있다. 인간성이 진리를 외면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탐구하여 볼 만한 매력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자체가 그 내부에 진리를 막는 차양막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인간은 상식, 관습 등의 포로가 되고 있지 않은가?

人間, 現象, 物自體에 관한 나의 관점은 위의 둘이다.


1973/10/21


외로움이 주위를 둘러싸고 나의 가슴은 떨린다. 孤獨! 아- 나는 眞理로 부터 이다지도 배척을 받아야만 하는가. 眞理란 무지개를 닮았는가? 산을 넘고 넘어도 손에 넣지 못하는 무지개한 말인가? 시장의 파리떼처럼 인간들은 들끓고 그들은 가식된 思想의 혼잡 속을 탐익하고 있다.

그들로 부터 철저히 孤獨하여라. 나는 現實 이상의 것을 원한다. 本體의 世界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이다. 나의 욕망이 소년의 그것이 되지 않기를.... 나의 희망이여, 위대하여라. 孤獨은 孤獨으로서 극복되어야 한다. 회피는 패배일 뿐.

어제 밤은 쓰라린 가슴을 안고 딩굴었다. 나만이 왜 그다지도 서글퍼야만 했던가. 왜 그다지도 眞理에 몸을 떨어야만 하는가? 왜소한 現實主義者가 되지 말고 거대한 理想主義者가 되라. 굳어지는 사고 능력. 音樂에 사랑에 나의 안락을 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孤獨을 더해 주어야만 한다. 나는 철저히 외로와야만 하는 것이다. 재창조되기 위해....

아- 나의 가슴은 바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뜨거운 눈물이 솟아남같이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하며 다시 탄생하여야 하는 것이다.


오랫간만에 들리는 천둥과 번쩍이는 번개였다. 세찬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커튼은 고요에서 벗어나 요란한 펄럭임을 갖는다. 나의 認識도 폭풍 같은 동요기를 지나 새로운 탈각된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나는 이제 哲學이라는 대로에 접어들었다. 그것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명령이다. 그것은 외로움을 뜻한다. 그러나 끝내는 환희의 경지에 도달하리라.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적 투쟁을 哲學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나에겐 절대 의무이며 당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哲學을 사막의 신기루 대하듯 생명을 건 단 하나의 바람으로 절대적 가치로는 여기지 않으리. 이때까지 나는 너무나 관념적인 思想 속을 헤매고 있었다. 哲學은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건설해 준다는 일방적인 오해를 하고 있었다. 哲學도 단지 일개의 학문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 眞理의 세계를 바라보는 최고의 學이다.

나는 순수함으로 哲學을 하여야 한다. 일체의 고정적인 신념이나 사고방식을 파기하고 純粹自我로서 원시상태에 도달하여야 한다. 거기로 부터 나의 인식은 확장되어 現象에로, 세계에로, 人生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聖人을, 哲人을, 위대한 思想家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흙으로 땀을 흘리며 생활하는 哲學人이 되고 싶다.


1973/10/23


현실에서 만족을 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행복을 찾지 않으련다. 표피적인 생활의 만족은 삶의 본질에 대한 회피. 生이 아무리 부정적이라도 그 본질대로 生 자체를 살고 싶다. 生이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眞理를 향하는 발걸음이 옆길로 흘러가진 않으리. 哲學은 나의 필연이다. 理想은 나의 태양이다.


우리들의 모든 知識, 常識, 學問은 괴멸되고 전복되어 純正性 위에 재창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人間인 한 生의 본질에 대한 탐색에 나서야 한다. 盲兒, 眞理에 대한 盲兒가 가장 두렵지 않은가? 대다수의 인간은 盲兒인 채로 죽는다. 아니 그들은 무기물과 같은 일순간의 존재일 뿐이다. 眞理의 태양을 향하는 한 人間 價値는 죽지 않는다. 모든 현실은 인간을 무기물화 시키고 있다. 현실의 일순간의 쾌락, 단순한 행복이 人間 精神을 뇌살시키고 있다. 인간은 현실을 眞理에 대한 반역자로 만들었다. 나는 철두철미 현실을 부정한다. 現象의 껍질을 벗고 純粹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 純粹 위에서 새로운 나를 건설하고 때 묻지 않은 思索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싶다. 나는 한 송이의 해바라기가 되고 싶다. 이러한 나의 精神은 영원히 지속되리.


K에게 나의 職業은 무엇이어도 좋다고 대답했다. 무엇을 하든지 나는 해바라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될 수 있다면 일생토록 哲學을 벗할 수 있는 硏究家가 되고 싶다. 다음은 文筆家. 그러나 敎師일지라도 나는 최대의 만족을 하리. 외부가 아니라 나 자신의 哲學을 하고 싶으니까. 小市民的 敎師는 절대 거부한다. 理想의 양식을 함께 먹으면서 피앙세와 함께 나의 위대한 생애를 살고 싶은 것이다.

주변의 一事一件에 喜喜哀樂하며 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태양을 향해 眞理를 구하는 한 쌍의 원앙이.... 나의 여성은 理想이어야 한다. 나 자신 속에 들어 올 수 있는 나의 심장이어야 한다.


1973/10/25


理論없는 實踐이 盲目이라면 實踐없는 理論은 空虛하다.

감춰진 나의 본성이 자만 가운데서 튀어 나올 때 나는 당혹한다. 나는 조잡가운데 행위 없는 논리만으로 고민을 만들고 있다. 행위는 철부지의 그것. 행위를 캄푸라지하기 위해 가식을 덮어 쓰고 인체 하는 건 아닌가? 현실 부정에 너무나 부정함을 느낀다. 일개의 평인에 불과하단 말인가? 인간적인 따뜻함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 서로가 되고픈 사랑을 또한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 創造의 길에 나섰다. 非創造的인 것을 철저히 회피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베토벤과 칸트와 그리고 너! 나는 나의 길에서 人間이 되지 못함을 통곡한다. 믿은 바를 주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긍지와 용기. 안일한 삶을 파괴할 정도로 너의 생활은 혁신적이어야 한다. 너의 생활은 너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스한 햇빛에 가슴은 녹는다. 싸늘한 바람, 외로운 가슴은 운다. 나는 언제나 울으리! 남 모르는 울음을 가지리! 삶은 理想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불 태워야 한다. -forever-


1973/11/1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사자의 모습에서 이제 暗黑 속의 무수한 불빛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孤兒일지라도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영롱하면서 차디찬 아침 이슬을 기다리는, 그 싸늘한 기나긴 밤의 忍苦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喜悅의 터전이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먹구름과 천둥은 그 울음소리 만큼이나 격렬히 장중하게 내면세계를 휩싸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한 송이의 개화가 아니라 假像을 찌르는 번갯불의 탄생이 그 날카로움이 어찌나 강렬히 기다려졌던 것인가?

내일은 번갯불에 맞은 변형된 나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 人生이란 하나의 過程. 그것이 나에겐 眞理를 향한 과정일 뿐이다. 언제나 한 가지로 理論을 사랑하고 眞理를 사랑하리라.


1973/11/3


哲學은 眞理를 향한 純粹學問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純粹와 眞理 - 이 말을 들으면 괜히 기뻐진다고 그대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先驗的인 純粹自我에의 복귀. 진정한 哲學者는 감각세계의 모든 것을 읽어야만 한다. 아니 내면의 모든 것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서만 그는 純粹思惟로서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으며 必當然的 明證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現象學的 判斷中止라던가? 그것을 지나친 觀念主義라고 두려워서 경원해서는 안 된다. 그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自我를 발견할 수 있으며 不可疑的인 확신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純粹를 부정하고 眞理를 거부하며 현실계에 집착하는 人間들은 니체의 말대로 시장의 파리떼에 불과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파리떼들을 깨우치러 맨 발로 나선 위대한 哲人이었다. 아! 靈魂의 깨끗함이여.

한 낮, 코트를 걸치고 Husserl을 옆에 끼고 걸었다. 眞理는 어디 있는가? 하늘의 별에서 땅의 밑바닥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내적 시야가 눈을 뜨고 빛을 발할 때 만이다. 內部로의 沈潛.


1973/11/4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쓴 웃음을 지으며 자네의 모습을 상기하고 있었네. X! 앨범을 펼치면 맨 아랫줄에 자네는 단정히 앉아 있었지. 술잔을 들고 허허 웃는 자네의 모습은 왜 그렇게 그 때의 사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인지.

人間은 자기 生을 창조하는 動物일세. 그것은 명령이며 人間에게 지워진 가장 큰 책임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人間은 창조하면서 進化하고 한 알의 익은 사과를 결실하지 않는가. 자네의 성숙한 모습을 보고 싶었네. 그 맑던 자네의 얼굴이 理想의 빛으로 채색되어 있기를 기대했었네.

X! 客觀을 무시하고 主觀에만 사로잡혀 있는 人間은 精神病者이다. 저 위대하신 敎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아멘 했지. 자네 역시 現實崇拜者라면 내가 자네를 안 것이 不幸의 원인일세. 英雄이 되려는 자는 俗人이 될 수밖에 없으며, 俗人이 되려는 자만이 英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자네의 오염된 英雄心은 옛 것과 함께 저승으로 날려 보내고 이승의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가?

X! 孤獨을 자랑하면서 自足하는 나 자신을 도와주려나. 自足하는 나는 輕蔑받고 싶네. 現存在인 人間의 천차만별에 나는 당혹과 의아함을 금할 수가 없네. 누구에게나 타당한 공통되는 人間의 근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存在 根源을 망각하면서 살고 있네. 人間이라면 가져야 할 내면적 통일성을 외면하고 있지. ‘人生이라는 책은 너무나 짧아서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人生 그것은 끝나고 만다’ 感傷的인 단어들의 위험성을 인식하겠나? 人間의 나약함을 강조하는 어떠한 것에도 나는 환멸을 느끼네.

X! 숙명적으로 주어진 자네라는 存在의 虛無感과 不安을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가? 현실에 몸을 피하고 安樂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자네를 지배하고 있단 말인가? 자네의 면박 앞에서 지렁이 같은 人間을 경멸할 뿐이네. 햇빛을 싫어하고 썩은 암흑 속으로 숨어드는...

X! 저 Greece哲學의 단순하면서도 望鄕的인 思想이 그립지 않는가? 가슴으로 잔잔히 파문쳐 오는 智慧의 물결. 眞理를 사랑했던 그들이기에 Greece는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네. 이젠 자신을 숨기지 말세. 자네의 앞길에 영광 있길.....


眞理를 향하는 자는 唯我論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眞理는 獨我的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先驗的 경험의 무한대한 영역, 그것으로서만 自我는 연구, 해명되며 세계는 존재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재하는 사물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나 사물은 先驗的 自我로서 인식된 noema로서 지향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철저히 관념적인 것이다. 感性界를 초월해 있으며 人間의 감각과는 무관한 저 관념상의 세계. 진정으로 哲學하는 자는 거기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先驗的 自我나 그로 인하여 인식될 수 있는 초월적 세계는 經驗界에 우선하여 앞서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대환원이래 哲學은 변혁되고 純粹主觀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先驗的 主觀性만이 절대 당위성을 가지며 모든 眞理는 그러한 근본하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百樣千態의 思想의 혼미 속에서 위와 같은 純粹해 지려는 哲學者의 의지를 보게 된다. 더 높은 정신세계에 도달하지 않고서 과연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때까지 지배해 온 확신이나 지식을 통한 판단 중지. 부정함으로써만 참에 도달하는 길이 열릴 수 있다. 先驗은 정복해야만 할 고지인 것이다.


認識의 出發

우리 진부한 얘기는 제외하자. 청아한 법당의 목탁소리, 삼경의 달빛과 함께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오염된 도시의 공기에서 벗어나 푸르른 대지의 상쾌함을 맛본 적이 있는가? 환히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그 순진한 눈망울을 닮고 싶은 적이 있었는가?

이와 같이 純粹에의 동경은 인간 의식에도 역시 작용하고 있다. 主觀과 客觀이라는 이원성에서 이때까지 우리는 자신을 客觀의 일부분으로 취급하여 왔다. 푸르른 하늘, 그리고 산과 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세계와 사물의 直覺的으로 전해지는 명확성. 거기에 비하여 人間의 내면세계는 망각되어 왔고 의식작용은 신비의 베일에 덮여 있었다. 우리가 主觀의 의식작용의 탐구의 문을 열자말자 그것의 풍부함과 중요함에 압도당하고 만다. 우리는 새로이 발견한 自我 앞에서 모든 것을 반성하게 되고 다가올 탄생을 위한 진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세계의 존재가 실상은 感覺의 表象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게도 자신만만하던 자기조차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에 우선 당혹하리라.

그렇다. 이렇게 함으로서만 진정한 人間 認識의 시초는 시작되는 것이다. 純粹自我로 부터 사유된 대상만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은 의식의 근본조건인 것이다. 哲學者의 완성된 認識에의 길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날카롭고 높은 절벽 위를 걷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意識을 탐구하고 타당성 있는 槪念을 산출하여야만 한다. 그가 일보라도 경계를 게을리할 때 되돌아 올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추락하듯이 그의 思想의 迷誤를 막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석과 종합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認識의 출발이라는 숙명적인 命題가 놓여있다. 정신 변혁의 장을 펼침에 있어서 哲學을 해보려는 노력에 있어서 眞實을 사랑하는 마음이 純粹해 지려는 욕망이 우리들을 인도해야 한다. 챔피언의 명예를 지키려는 복싱 선수의 집념같이 眞理를 수호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강해야만 하는 것이다.

認識의 出發. 그것은 곧 잊혀져 왔던 내면세계의 개안이다. 지상의 것이 아닌 태양을 바라볼 줄 하는 자만이 참다운 認識의 소유자라 할 것이다.


1973/11/5


人生! 人間 存在라는 지독히도 모순된 덩어리를 안고 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paradox에 연출하고 있다. 나는 나의 存在를 경멸할 뿐이다. 存在의 배후에 숨어있는 절대의 정체는 무엇이든 현존하는 나의 存在는 혐오감만 자아낼 뿐이다. 타인의 存在도 마찬가지. 숨이 막힐 듯 답답하고 옹졸한 덩어리. 구역질이 나는 그 存在에 자족하는 너희들을 차마 人間이라 부를 수가 없구나.

이때까지 나의 認識은 인간 存在를, 理性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存在란 얼마나 저주받아야만 마땅하단 말인가?

「어디에나 무한히 있고 항상 어디에나 있는 存在, 그것은 혐오해야 할 물건이었다. 나는 그 부조리한 存在에 대한 노여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부르짖었다. 아, 더러운 存在! 더러운 存在! 나는 그 끈적끈적한 오물을 떨구어 버릴 생각으로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오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톤인지도 모르는 存在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이 헤아릴 수 없는 권태의 밑바닥에서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 왜소함과 오류 투성이. 나에게 그것은 오물 속에서도 자족자만하는 구데기와 같은 것이었다. 더러운 存在! 부조리한 存在! 理性이라는 이름의 아이러니를 본다. 理性은 우리에게 진위를 가름해 주지 못한다. 악습은 理性 속에 스며있고 理性은 폐쇄된 공간 속에서 얼마나 그릇된 활개를 치고 있는가?


Paradox 속에서 우리는 목표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구? 아- 너는 그렇게도 미련했던가? 지식을, 재능을 앞세우는 너희들에게는 역겨움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경멸해야만 할 것들인가?

덮쳐오는 괴로움.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수평선. 대해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관념의 세계를 헤매고 있다. 아니 存在 자체도 관념 속에 떠 있는 것이 아닌가? 人生을 바라보기만 할 수 없다. 구역내를 맡든 향내를 찾든 人生 속에 뛰어 들어야 하는 것이다. 存在를 경멸할 수밖에 없다. 세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나의 存在여! 구더기 같은 너일 망정 사랑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1973/11/7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부로 침잠해 볼수록 人間 存在의 왜소함, 人生의 모순, 우리는 아무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이 그저 부조리 위에 떠있는 외롭고도 비참한 하나의 생명체라고 여겨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사물들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가? 얼마나 무수한 소리들이 귀를 울리고 있는가? 허나 그것들이 인간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저 아름답게 있는 것, 아니 도전하는 자세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

人間은 육체가 아니라 특수화된 觀念이 아닐까? 무정신인 自然은 假像의 모습을 하고서 人間에 맞서고 있다. 한 꺼풀 허물을 벗겨보면 거기에는 人間과의 대립, 암투, 자연의 실상이 보일 것만 같다. 자연을 극복하고 現象界를 초월하려는 人間 意志와 거대한 위력으로 압도해 오는 人間을 위축시키려는 自然의 자세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마찰이 존재한다. 人間 存在란 긴장의 대해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어선, 그저 외롭고 불안한 것.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이 - 자신도 모순 자체니까 - 虛에서 맴돌다가 人間은 無로 사라지는 것인가?

人間 精神의 미약함으로 무엇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眞理가 人間 精神을 통하면 거짓으로 변형되어 나온다. 통일성 없이 무원칙하고 불합리한 인간간의 관계. 人間이 소속되어 있는 근본이란, 人間에 숨어 있는 본질이란 우리가 용납하기 힘들었던 이와 같이 虛하고 paradox적이 아닌지.


1973/11/8


자기 합리화라는 의식이 인간 정신에 과하는 부담감은 어떻게 설명하면 타당할까? 人間 存在에서 절대적 목표라는 것이 발견될 리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누구든지 무목적성 또는 상대적 목적을 갖고 생존해 나간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상대적 목적이라는 것이 인간 욕구에 충실하지 못하는 법이어서 개개인 누구나 자기의 목표-행위-를 반성해 보게 되고 확신을 얻지 못함으로써 끝없는 동요 속을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의심 가능한 목적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하여 타의 행위를 거부하고 이득을 포기할 때 그는 목적의 회의 속에서 번민하게 마련인 것이다. 이 때 자기 합리화라는 특수한 형태의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 그와 같은 의식은 목적 자체를 공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自我의 분열까지 낳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의식은 人間을 저 宇宙의 한 가운데-無에로 끌어 올려놓은 결과가 되리라.

人間은 神의 졸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人間은 철저히 동물적이지도 철저히 神的도 되지 못하는 存在이다. 따라서 그 자신 숙명적으로 한계성과 모순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人間은 절대를 향하지만 그것은 人間에게 완전히 배척되어 있다. 眞理와 人間과는 예로부터 판이한 차원의 세계인 것이다. 넓게 본다면 人間의 모든 행동이나 思考란 자기 합리화의 한 表象에 불과할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에 속으면서 사는 것이 人間이 아닌가 말이다.

A는 考試에 목표를 두고 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考試라는 그늘 아래서 자신만이 가정에서 우대를 받고 있다. 가정을 도울만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목표가 가정을 도울 때 그의 희생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합리화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이것은 낮은 급의 예이지만 이와 같은 자기 합리화 의식은 자신을 저주하게 될 뿐 아니라 확고한 목표까지 붕괴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다.

人生은 부정의 연속이어야만 하다. 自我는 그러한 방법으로서만 눈 뜰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자기 합리화라는 의식이 낡은 목표를 파괴하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生에 관한 목표를 발견하는 동인이 될 때 그것은 창조적인 自我 否定이 되는 것이다. 결국 人間의 모든 의식은 自我를 초극할 수 있는 데서만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主觀에만 사로잡힌 思想은 공허한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러나 理論없는 나의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1973/11/9


오랫간만에 둑에 올라서서 눈 아래 전개되는 풍경을 보면서 가슴이 확 트임을 느껴본다. 발 아래로 무한으로 보이도록 널려있는 집들, 집들... 점점 시야가 멀어 질수록 그것들은 아득한 소외감을 느끼게 하면서 땅으로 침잠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人間의 靈魂은 하늘을 향하면서 대지로 부터의 필사적인 탈출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에서처럼 그것은 숙명적으로 인간에게 과해진 운명이랄까. 만약 저 宇宙의 끝에서 지구를 보는 거대한 눈이 있다면 그에겐 人間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석되고 있을까? 미소한 현미경적 존재로서 그 무엇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논외적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부할 만큼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낯선 거리를 걸었다. 거기엔 관념적으로만 느끼고 있었던 또 다른 부류의 인간들이 있었다. 거리를 흐르고 있는 오물 냄새, 키만큼도 되지 못하는 집들, 삶에 대한 찌들은 얼굴들이 마음을 슬프게 했다. 生存이란 무차별한 투쟁이며 강자와 함께 버려진 약자들이 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돈이 아닌가? 돈이 없으면 인간이 짐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인간은 돈을 아는 동물이다??? 친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정신(머리)이란 돼지코다. 그것은 돼지코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찾기 위하여 주어진 한 도구에 불과하다” 지독히도 모멸적인 말이었지만 허나 지금은 웃을 수밖에 없구나. 우리는 돼지와 같이 되도록 현실계에 내던져져 있다. 현실은 우리를 돼지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現實을 외면하여 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발은 땅을 딛고 있으면서 나는 풍선처럼 觀念의 세계를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理想이란 사치가 될 수밖에 없다.

現實과 理想과의 調和. 누군가가 말했지. ‘現實과 理想은 끝없이 평행을 이루고 있는 레일과 같다. 기차는 양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理想과 現實은 동등 관계가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現實은 理想에 복종하는 추종관계여만 하는 것이다. 物慾, 權力慾이 저 眞理를 사랑하는 마음과 어떻게 동등할 수 있으며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둘은 배타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現實을 저주하게 되는 것이다. 現實에 집착하는 무리들, 참된 것을 모욕하는 무리들을 어찌 경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現實은 理想의 반영이라야만 하는 것이다. 人間은 人間이라야만 하는 것이다. 本質을 탐구하는 자세는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본질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겠으나 그러나 인간의 한계적인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人間이기에 가장 고상한 의지가 아니겠는가? 이름 없는 밤하늘의 조그만 별 하나가 사라진다고 우리들의 생존에 관한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라지는 저 조그만 별에 애도를 보내면서 우리들의 생활은 새로운 별의 탄생을 기다리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1973/11/10


잠을 깬다. 어슴프레 윤곽을 나타내는 방 안의 물건들에 눈을 감으면서 몽롱한 가운데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일 수 있는가? 나의 내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나라는 존재와 동화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감각은 표면에만 떠있고 멜로디조차 나의 심저를 울리지는 못한다.

存在 가운데서 나는 존재한다. 거기서 나의 存在는 무슨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무수히 널려 있는 存在, 存在. 나는 고립하여 그들을 응시할 뿐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느 것을 붙잡으려 해도 그것은 虛妄이며 孤獨만이 남을 뿐이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호흡한다. 살기 위하여 오늘도 눈을 떴다. 삶! 끈덕끈덕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生命. 삶, 그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不安은 무엇인지, 무엇으로 부터 오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불안한 것. 나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무한의 空間과 時間 앞에서 나는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발판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한 人生에서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인간들을 존경하면서 불쌍하게 생각한다. 허나 너희들에게 조차 不安이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내일을 알지 못한다. 과거는 흘러간 것으로서 망각 속에 묻혀질 뿐이다. 時間이 나를 압박한다. 흐르는 時間은 죽음으로 인도한다. 일시의 환락이 어찌 나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의 孤獨이 하나의 悲劇을 맞으러 나는 나섰다. 나는 그것을 바란다. 人生을 통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人生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자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나는 흐르는 時間 위에 놓여 있다. 육체는 나의 뜻에 상관없이 성장하여 목숨은 벌레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조차 모른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無知 속에서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人生이 파동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 길을 알지 못하는 파이다. 그것은 나아가지만 다음 순간 어떻게 변할지 우리는 조금도 예감할 수 없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하나의 어둠으로서 나도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生의 이유, 목적, 본질은 인식으로 부터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人間은 무조건적으로 생존해야만 한단 말인가. 조그만 즐거움을 찾기 위하여 근원적 고뇌를 멀리 할 수는 없다. 生과 결부되지 않은 공허한 思想은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누구나 生을 거부할 수는 없다. 거부할 수 있는 生이라면 그것은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끈적끈적하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 生, 그 놈의 정체는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 놈과는 맞싸워서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生을 용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불유쾌한 친구일 망정 나의 내면세계로 이끌여 들여야 하는 것이다.


1973/11/11


몇 시쯤 되었을까? 눈을 떴을 때는 본능적으로 머리맡에 놓인 라디오로 손이 간다.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한껏 떨리고 있다. 아하, 7시 몇 분쯤 되었겠군. 다이얼을 동양으로 돌려서 기악곡을 들으며 누워 있다.

일요일, 나에게는 표면적인 외로움을 일깨워 주는 날이 아닌가. 6일이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당황하게 만드는 일요일. 나는 일요일 아침이 되면 어찌 할 바를 모르곤 했다. 찾아 갈 곳도 반겨줄 곳도 없이 일요일의 불안은 외로움이었으며 자아 모멸로서 나를 괴롭히곤 했다. 일요일, 오늘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어제 저녁에 결정해 둔 것이었다. 나의 신경은 성경을 든 손에 까지 예민해져 있었고 도대체 잿밥에 눈독을 들이고 염불하는 나의 행동에는 비참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쌀쌀한 날씨다. 신문이 문 앞에 놓여져 있었다. 「축구 또 호주와 무승부」 이런 타이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 어제 TV로 보았지. 2:0으로 이기고 있을 때는 정말 신이 났다.

부엌을 고친다고 온 식구가 법석댄다. 오늘 아침은 꽤나 날씨가 차군. 엎드려서 ‘存在와 無’를 본다. ‘否定의 起源’ 첫 부분이다. 우리가 부정자로서 부정을 물을 수 있는 것은 비존재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와의 상호 관계는 어떤 것인지? 모든 존재에는 언제나 무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가?

자, 이젠 나서자. 찾아 갈 곳이라곤 Y밖에 없다. 녀석이 있어 주어야 할 텐데. 오늘이 11일. 그러고 보니까 ‘아이다’의 공연 마지막 날이군. 여차여차하면 거기나 가야겠다. 막연하다. 코트를 걸치고 「存在와 無」를 옆에 끼고 집을 나선다. “밖에 좀 다녀오겠어요”

맑은 날씨에 거리는 분주하면서도 어딘가 못마땅한 듯 불안해 보인다. 칼날 위에 평행을 잡으려고 애쓰는 나무토막같이 모든 것이 파멸 앞에서 건들건들 거리는 것만 같다. 11시가 넘으니까 붉은 책을 든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안일한 자여! 너의 이름은 무지와 불행이니라. 588번이 온다. 창문 옆에 앉으니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시다. 양 포켓에 손을 찌르고, 나를 보지 말아다오. 따가운 햇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뿐이니까.‘더러운 존재! 더러운 존재!’라 외친 로깡땡의 생각이 난다. 스쳐가는 무수한 건물들과 인파. 존재가 존재 속에서 존재를 경멸한다. 나만이 두 번의 괴로움을 겪을 수가 없단 말인가? 기는 것 가운데서 뛰고 싶다. 철저히 고독해 지고 싶다. 사랑을 바라는 것에, 영혼의 휴식을 바라는 것에 나는 왜 비통함을 느끼지 못하는가? 버스가 정거할 때 마다 타고 내리고, 옆 사람의 육체적 감촉까지 전해 오지만 나와 그들과는 절단되어 있다. 무관심하도록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다. 저 눈 빛. 자연과의 투쟁에서 인간은 연대감을 배워왔다. 허나 자연이 정복된다면 인간은 멸망하리라. 그 때는 인간끼리의 투쟁 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까. 옆에 있는 책만이 나의 마음이다.

계림극장 앞이다. “학생이요?” 끄덕 끄덕. 제기랄, 묻기는 왜 묻는담. 아마 12시 쯤 되었을 것이다. 담배를 피워 문다. 녀석이 술을 좋아 한다면 소주 한 병 샀을 거다. 이런 대낮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녀석이 요사이는 나를 다르게 보고 있어. 철학이라는 말을 몇 번 썼더니 그것이 무슨 위대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나를 진지한 인간으로, 속에 무엇이 있는 것으로 대하는데는 -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 정말 말 못할 외로움이 나에게로 돌아오곤 했다. 친구여! 실은 그 반대일세. 나의 이 초라함을 자네는 왜 간파하지 못하는가? 생의 막연함 앞에서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가? 시원의 고뇌까지 이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저주하네.

책상 위에는 「생활의 발견」이 펴 있고 흐트러진 낙서가 시험지 위에서 시선을 끈다. 코트를 벗고 불이 꺼졌다는 방에 앉는다. 미지근한 감촉, 오는 길에 사온 엿을 나누어 먹는다. 어린 시절, 엿을 무척이나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서 울려오는 엿 장수 가위의 챙강챙강하는 소리. 헤어진 고무신을 주고 바꿔먹는 엿 맛. 바사삭 부숴지면서 착 녹아나면서 얼마나 아끼던 그 맛이었던가.

“어제 송룡이가 왔더라”“그래? 어떻게 지낸다더니?”“똑 같애 옛날하고. 하나도 안 변했어. 생각하는 것도 똑 같고”“흐흐”“너 얘기하면서 또 그 계집애 얘길 하잖아. 둘은 「향연」의 나누어진 짝인지도 모르지”“참 지독히도 안 잊어 버린다. 스치는 모습을 한 번 보고는 아주 혹한 모양이지”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공허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친구는 또 변한다는 말을 했다. 친구여! 우리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인식하세.

잠시 동안의 축구 얘기. “「생활의 발견」 저기까지 읽었나?”“응, 읽고 싶을 때 읽어. 싫증나면 그냥 덮어 놓고. 어떻게 보면 웃길려는 소리 같고, 뭐 진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난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와 나와는 정말 다정한 친구가 아닌가? 크나큰 태풍이 불면 쓰러질 것만 같은 우정. 대학 생활에서 녀석을 얻은 것이 얼마나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인가.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철저한 외톨박이로 폐쇄된 자아의 울안에서 얼마나 타인에 환멸을 느꼈을 것인가?

친구가 「존재와 무」를 펼치면서 “존재와 무, 이 말이 참 좋단 말이야. ‘어디에나 무한히 있고... 나는 그 끈덕끈덕한... 아, 더러운 존재! 더러운 존재!...”“문학적 표현 때문에 그렇지”“그런 것도 있고 뜻이 의미 있는 것 같애. 존재. 그런데 존재란 뜻이 여러가진 것 같지. 여기서는 자기에게 환멸로 느껴지는 존재인 것만 같고...”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을 존재라 할 수도 있겠고 현상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일어섰다. 시간은 12시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집에 가서 점심이나 먹고...” 우리는 H 집을 찾아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3시의 과 모임에도 휴식삼아 참석하기로.

대로에 나서니 강해진 싸늘한 바람이 더욱 목을 움츠리게 한다. 사람이 지나 간다는 것에, 내가 존재 옆을 존재를 밟으려 걸어간다는 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은 무엇인가? 애써서 느끼려는 억지로 진실을 꾸며대는 심정은 얼마나 나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인가?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없다.

H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소를 들고 찾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그의 집은 초인종 누르는 것을 서먹서먹하게 한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 소리. “H 있읍니까?”“교회서 아직 안 들어왔는데요” 고용되어 있는 듯한 여자의 대답. “1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겠읍니까?” 1층 응접실서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피아노가 전화가 냉장고의 웅웅거림이 낯 선 환경으로 의식을 멍멍하게 한다. 그것들은 심한 저항감을 느끼게 하면서 나에게는 만지기에도 두려운 이질적인 존재였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우리는 H가 형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제야 녀석이 들어오는군. 양복을 입고 - 학교에는 언제나 교복을 입고 오면서 - 녀석은 아직도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인상을 하고 있군. 2층으로 올라간다. 우리가 기대한 곳이 바로 여기군. 음악. 도사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그러나 부럽지는 않다. 나의 책을 보면서 “얘가...”하고 말하는 너야말로 화려한 돼지가 아닌가? 나는 초라하고 불행한 인간이 되고픈 것이다. 클래식과 팝송. “젊은이라면 팝송을 즐길 줄 알아야지. 얼마나 좋은 팝송이 많어?”“팝송은 어린 애들이나 듣는 거지. 다방 같은 데서나. 클래식이야말로...” 골고루 들은 꼴이 되고 말았다. 운명, 비창, 남진, 이별..... 우리는 그를 조롱했지만 나에게는 자신없는 조롱이었다. ...척이라는 관념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바로 내가 아닌가?

시간은 3시를 지나고 있다. 자, 가자. 동궁다방으로. 을지로로 청계천으로 걷다. 둘의 대화는 앰프, 스피커밖에 없다. 거기서 재미를 찾지 못하는 내가 돈 것인가? 그들의 대화는 왜 삶의 중점을 회피해야만 하는가? 경원과 저주 사이를 나는 오락가락한다. 만원의 다방에서 지각한 우리들이 앉을 자리란 “미안합니다”하곤 모르는 사람과 앉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도 않는다. 차라리 잘 되었어. 나의 옆에는 아가씨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코 큰 미국인이 앉아 있다. 분명히 서 있지는 않았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학교의 주인인 우리들이 수업을 받아 줄 것인가? 좀 더 놀 것인가?’ 토론하는 과우들의 목소리, 다방의 소음, 목 쉰 듯한 음악. 모든 것이 지치게 만든다. 지루하고 지겹고.

존재는 많지만 거기에 대하여 갖는 나의 관점은 초라하다. 저 쪽의 아가씨가 나를 보고 있군. 어떻게 느꼈을까? 옆의 아가씨도 나의 책을 보면서 존경의 눈망울을 해 주진 않을는지? 아- 구역질이 난다. 존재가 나의 의식을 뺏어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구역질을 느낀다. 나는 더러운 존재! 리듬을 따라 박자를 맞추고 있던 나의 발끝은 순간 정지하고 만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남의 것을 뺏는다고 좋아 하면서 자기 것이 없어지는데 대해서는 슬퍼할 줄 모르고.

하여튼 거기를 나설 때는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가로의 네온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러한 때. 지하에 있던 몇 시간도 흘러가 버렸다. 도달할 수 없는 피안으로 사라졌다. 꽁초로 남은 담배 6개비와 함께. 우리는 청계천을 을지로를 가로질러 장충단공원으로 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왜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친구는 왜 나를 따라 오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 둘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산에서 가로등의 불빛이, 칙칙한 숲에서 울어 나오는 그 불빛이 더욱 고적함을 느끼게 해 준다. 국립극장의 붉은 불빛이 시야에 머문다. 우리는 답답했다. 무엇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가? 그것은 현실이었고 생이었다. 우리는 현실의 생을 살고 있다. 영화 ‘summertime killer'의 라스트 신. 현실을 외면하고 사랑을 구해준 주먹코의 가슴에 붉은 총알구멍이 뚫릴 때 어찌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바위를 깨어 보려고 주먹으로 때리는 그러한 울분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악마의 성 앞에서 피 흘리는 가슴을 안고 죽어 가야만 한단 말인가!

친구여! 자네는 조소하지 않겠지. 죽음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고 고통과 권태는 우리의 운명일세. 일 초 일 초 흘러 버리는 금속성의 소리. 저 누구도 믿지 않는 에테르의 감촉을, 흐르는 시간이 내 가슴을 파 들어오는 숙명의 쓰라림을. 아, 우리의 심장은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 진리의 소리를, 번갯불의 번쩍임을. 한 여자와 헤어질 때였다. 하늘을 보니 그 넓은 허공에 하나의 별이 오직 하나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때 나의 가슴에 새겨진 그 별 빛,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단지 하나의 별이....

탁구를 치고 나왔지만 시원해질리 없다. 잠든 분수대에서 손을 씻고 파장이 된 듯 허전해진 거리를 걸었다. 쓸쓸한 일요일. 한 잔을 청했을 때 친구는 몇 번이나 거절했다. 친구여! 우리는 그럴 사이가 아니잖는가? 문을 열었을 때 째지는 듯한 고고 리듬. 붉으레한 조명 아래 한 쪽 구석에선 꼭둑각시같은 여자들이 리듬을 따라가느라 열이 나 있다. 술에 춤에 마취된 인형들. 깍두기에 술 한 되를 앞에 놓고 겸연쩍게 우리는 구경했지. 꿈틀거리는 엉덩이. 욕망을 부르는 육체에 다시 구역질이 이네. 더러운 존재!

“내일 만나세” 계속 걷고 싶다. 무지개처럼 채색되는 나의 고독이여! 고개를 들 용기가 없네. 보석처럼 반짝여라, 나의 외로움이여! “할머니, 엿 50원어치만 주세요” 어쩔 줄 모르는 그 할머니의 손길을 내가 어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할머니의 머리에 있는 수건은 나의 잊혀져 가던 고향. “자요, 아저씨 여기 있어요” ‘할머니 난 아저씨가 아니예요. 이 놈 엿 가져가거라. 이렇게 외쳐 보세요’ 무엇이 잘못 되어 있단 말인가? 땅을 세게 밟아 보아도 그것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과 존재와 인생. 이들의 본질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만을 아는가.

청계천 2가에서 버스에 올랐다. 도중에서 좌석이 하나 났으나 어떤 잽싼 여자 덕분에 계속 서 있어야 했다는 것 뿐. 9시 가까이 되어 있다. 잠이 나에게 엄습한건 12시 가까이 되어서였다.

1973/11/15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로깡땡은 무엇이며 휴머니스트는 무엇이며 제 3자인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뒤따른다. 찬란하던 햇빛은 어두움으로 침몰해 버리고 카오스. 무엇에 놀란 바람인가? 비와 함께 유리창을 때리면서 그것은 외친다. 무엇을 갈구하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肉體는 慾望을 부른다. 피할 수가 없다. 다이얼을 돌리면 음악이 나온다. 필연성이다.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는 없단 말인가?

방 안이 금방 환해진다. 문을 열으니 나약해진 빗방울을 뚫고 강렬한 햇빛이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 명암의 선명함이란. 하늘에는 구름 덩어리들이 무엇에 쫓기듯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시커먼 먹구름에서 흰 솜 같은 것들이 미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면서... 시야의 앞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存在들이 위압감을 주면서 젖어있다. 두렵다. 무언가 바라고 있다. 모든 것들이. 그 內在的인 비밀을 어찌 우리가 알 수 있으랴. 흘러가는 한 결의 바람에도 나의 가슴은 두려워 진다. 이것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무엇이 이다지도 괴롭게 하고 있는가?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의식은 形而上學의 길을 超越的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事物의 신비성을 부정한다. 허무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인간이 그래도 잘 살고 있다. 현실의 敗者가 理想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인간이기에 현실의 외면은 실로 한계점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자만큼 초라한 존재도 없다. 나의 갈구는 신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인간 인식의 범위는 무한한 듯 하면서도 조잡하다. 그것은 왜소하다.

人間 意識(感情)의 변화란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 것인가! 내면세계의 모습은 얼굴의 표정으로서 표출되어 진다. 몇십 년 후면 고정되어 있을 나의 顔象에 대하여 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통째로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짓인가. 개개인으로서의 특성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상반되는 두 의식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충돌하며 거기서 일어나는 스파크는 저 심연의 고통으로 끌어 들인다. 그것들은 복합된 감정을 형성한다. 僞善과 自慢과 英雄心理와 自虐과 백합을. 충실한 존재자, 이단적인 반항아(현실에).

人間은 스스로 가시덤불을 헤치기를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大路를 원한다. 나는 그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헤겔의 인상을 보면서 웃은 일이 있었다. 眞理를 사랑한다는 哲學者의 면모치고는 너무나 기대밖의 얼굴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헤겔은 ‘인색한 고집 센 맥주집 주인’상이었고 그렇게 말한 쇼펜하우어는 더욱 꼴불견이었다. 그가 한국에 온다면 아마 저 불명예스러운 ‘오물 수거원’ 노릇밖에 못할 운명이리라.

상호 인신공격의 비방은 그들의 人格을 의심케 한다. 대립되는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그래도 眞理를 사랑하는 哲學者로서의 이해는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참 眞理를 미혹하는 것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그들은 주장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眞理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자들은 자신이 人間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自我 誇大妄想症에 걸린 불쌍한 환자들이다.

현실에 일희일비하며 金錢, 權力, 官能的 快樂만을 추구하는 눈 먼 대중들에 비하면 迷誤의 길일망정 眞理를 따르려는 마음 자세는 최고의 아름다운 것이리라. 쇼펜하우어, 헤겔 두 哲學者의 인상을 어제 버스에서 보았다.


1973/11/16


어제는 왜 그런 글을 쓰려고 시도했던가? 피덴틱한 채 자기의 가상을 세우려는 나의 모습에 이젠 진저리가 난다. 그 얼마나 순수함과 나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것을 갈망했던가. 그러나 지금 나를 속이는 것은 外界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온갖 이즘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겨울 序曲이라고. 대학 신문에 글이나 투고하며 문장 다듬기에 정력을 쏟는 저 개떡같은 자식들을 경멸한다. 자신을 기만하면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눈을 뜨면 뜰수록 그 때 우리는 느끼리라. 우리가 認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미소하며 진실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사물을 볼 때, 음악을 들을 때 나는 그것들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자신의 비밀을 숨기며 흘러가는 무수한 存在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역시 하나의 存在로서 떠 있을 뿐이다. 存在에 밀착하지 못하고 그저 현재에 存在하고 있다. 過去는 망각이며 無存在인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기만이며 또한 自我 완성이다. 진실되게 표현한다는 것, 그것만큼 중요하며 어려운 작업이 또 어디 있겠는가. 假飾을 벗어라.


1973/11/17


흩날리는 눈을 본다. 신선하고 싸늘한 대기 속을 무질서한 듯 춤추며 나리는 눈. 물기를 닦던 수건이 입에서 멈추고 나의 눈은 아스라히 움직일 줄 모른다. 눈이다. 희고 흰 순수함이다. 대지가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그것은 찾아오고야 만다. 만상을 덮어 버리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눈. 오만이며 냉혹이다. 그다지도 기다리던 눈이었건만.... 그 속을 걷고 싶다.


<환상>

눈은 이미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난 이제 땅을 밟는 것이 아니라 눈을 밟고 있다. 그다지도 우중충했던 것들, 황금빛 햇살을 받고 가식으로 빛나던 무지의 존재들, 그것들은 이미 눈 속으로 침잠하고 그래도 지탱하려 자신과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주먹 같은 눈이 나린다. 머리 위로, 코트 위로. 눈을 감으면 부드러운 손길로 애무해 주는 여인이 있다. 눈이다. 기차는 달린다. 달빛은 눈에 덮인 희디 흰 산야를 노랗게 물들인다. 멀리 보이는 저 봉우리는 다이어몬드 마냥 반짝인다. 나타나고 흘러가고 희한한 계곡 속을 나는 달린다. 기차는 플랫폼으로 들어선다. 하얗게 이는 눈보라. 레일에서 부터 일어나는 그 비말은 눈 속으로 목으로 파고든다. 눈이 아프다. 파랗게 빛나던 그 수은등, 부산한 여객들, 제복을 입은 역원의 움직임. 기차는 괴물마냥 빛을 발하며 서 있다. 차장의 푸른 깃발, 어디로 가려느냐? 나의 손은 허공을 흔든다. 그리고 나의 눈으로 돌아온다.

나는 걷고 있다. 대 침몰, 태평양에 있었다던 무어대륙의 몰락을 상상해 본다. 이제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다. 저 우산을 받쳐든 군중들의 오만스러움이 나의 시선의 목표가 되지는 않는다. 손바닥에 앉은 눈 한송이는 금방 녹아 버린다. 그것은 물이라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그 순식간의 탈바꿈이 이렇게도 보인다. 껍데기만 남겨두고 순수는 살 속으로 스며든 것은 아닌지.

베토벤의 환희가, 그의 운명이 들린다. 모든 것이 조잡이다. 버스를 타자. 입김이 따스고 발이 시리다. 언젠가 눈이 쏟아지는 날, 거울 속의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땅에서 나에게로 집중되는 듯한 검은 눈송이들, 그것은 대지에서 나오는 나를 집어 삼킬 듯한 두려움이었다.

쓸쓸한 교정. 눈을 이고 고개를 숙인 때 늦은 화초들이 가련하기 그지없다. 과학관 건물이 흐릿하게 저 쪽에서 거부의 몸짓을 하고 있다. 중학생 둘이서 강아지들 마냥 장난을 하고 있다. 아, 나는 눈 속에서 파묻히고만 싶다. 눈을 보고 기뻐하는 어린 아이의 즐거움이, 할머니의 미소가. 딴 세상.


1973/11/24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 아, 나는 또 다시 나의 生活을 속박하며 目標를 찾으려는 愚를 다시 범할 작정인가. 이때까지 나는 그랬다. 現實界에 있어서의 조그만 目標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저 원대한 理想이 그와 같은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도대체 人生에서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만한 가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또 다시 그런 어리석은 악순환의 길로 들어서려고 하지 않는가. 哲學에 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은 나의 存在의 消滅이다.

나태가 나를 휩싸고 나는 구렁 속으로 침몰한다. 現實이 무릎을 꿇도록 강요한다.

피하기 위해서 空想이 온다. 自足속에서 나는 그것을 맞아 들였다. 아, 그때 나는 얼마나 비참했던가. 眞理를, 純粹를 사랑했던 옛날은 어디로 가고 말았는가. 나는 빛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암흑의 유혹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그것을 뿌리치고 외로운 光明에의 길로 나서야 한다. 시간이 나에게 삶을 강요한다. 풍부한 시간, 나는 나의 의지로서 삶을 창조할 수 있다.

人生. 절대적 목표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왜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가. 사소한 것에 인간의 온갖 것을 바치는, 理性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저 무리들을 보라. 너희들을 보면 인간이란 것도 별 것이 아니다. 形而上學을 물을 수밖에 없다.


1973/11/25


중도에서 쓰던 글이 막혀질 때면 어쩐지 슬픈 생각이 든다.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쓰기가 싫어질 때 막연함 앞에서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펜을 들 필요가 있을까? 문장이 다듬어지거나 思想이 왜곡되어 적혀질 때 불쾌감을 느낀다. 단지 나 자신을 표현하고픈 것이다. 眞實되게.

자 이젠 나는 어떤 知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혼란될 뿐이고 그리고 著者와 같은 思想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니 나는 나 자신을 느껴야 한다. 自然은 외면할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때까지 나는 超越的인 思惟만을 주장하면서 現象界는 절대 거부하지 않았는가. 自然의 美를 느낀다는 것에 혐오감을 갖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타나엘이여, 到處 이외에서 神을 찾기를 바라지 말라. 被造物마다 神을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神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시선이 자기 위에 머무르게 되자 어느 被造物이건 우리로 하여금 神에게 등을 돌려대게 하는 것이다’ 自然이 말하는 소리를 眞實되이 들을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실천없는 理論, 느낌없는 思惟는 헛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면 나는 그것을 밟아보고 싶은 것이다.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갈망한다. 나는 사랑할 대상을, 眞理를 사랑으로서 맞아들이리.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번갯불.

보상을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짓인가. 몽롱한 수면 속에서도 나는 기대한다. 잠이 깨면 햇볕은 나의 얼굴을 비추리라고 - 이것은 보상이 아니라 나의 사랑인 것이다. 汎神論- 神은 외계에 따로 존재하는 유일인이 아니라 萬象이 神이다. 神은 곧 眞理 자체이다. 나의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眞實을 내포하고 있기를. 그러나 그 모양들은 假象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자는 없다. 現象에 속는 것과 그것을 초월하여 眞理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

人間 권태기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저 희미해져 가는 理想의 불빛과 그리고 다가오는 現實의 압박감이 나를 슬프게 한다. 理想이 나에게 빵을 줄 수 있는가? 친구여 그러나 나를 오해하지 말아다오. 아직까지는 理想의 불빛이 나의 가슴을 밝히고 있으니까. 대범이 필요하지 않는가. 또한 굶주림이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포식은 돼지를 닮는다. 구정물을 좋아하는 돼지 말이다.

言語상의 유희는 끝난다. 沈黙 속에서 잉태될 나의 生命을 위하여.


1973/11/26


나의 認識에서 時空은 제외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모습으로 存在하고 있는지. 時間은 흐른다. 아침이 밝아오고 저녁의 황혼이 금방 찾아온다. 時間은 人間에게 강요할 뿐이다. 낮과 밤을 창조한 神은 잔인했다. 나는 낮과 밤의 간단없는 계속 속에서 나의 生의 무미건조한 제 자리 걸음만을 느낄 뿐이다. 둔하게 빛을 발하는 백열등과 마주하며 또한 아침의 창백한 햇살을 상상한다. 시간은 아침이기를, 저녁이기를.... 나는 거기에 갇힌 죄수. 탈출할 가능성은 전무한 상태에서 나는 人間의 運命을 감수하려 하느냐.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점점 파리해 진다. 暗黑을 먹고 사는 내가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개미 한 마리가 나의 손등을 기어오른다. 보기 싫은 存在. 나는 도저히 現象하는 存在들을 사랑할 수가 없다. 存在는 왜 나의 손등을 오르고 그리고는 멀리 내팽겨쳐져서는 또 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가. 맹목과 공통으로 현존하는 것들을 내가 어찌 사랑할 수 있으리. 나의 코는 꽃의 향기를 맡지 못한다. 나의 눈은 무지개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나의 思念은 事物에게로 향하기를 원치 않으며 나의 사랑은 理性 자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生命의 신비라고 인간들이 그렇게 敬畏하는 것도, 自然의 美라고 인간들이 그다지도 感歎하는 것도 그것들은 모두 자신들이 感情의 動物임을 시인하는 말이다.

한 방울의 精液이 나의 옆에 놓여있다. 人間의 벗을 수 없는 굴레의 산물, 저주를 한다. 저 한 방울의 가장 부끄러운 액체가 人間이 그렇게도 떠벌리는 生命의 원천이다. 나는 生命을 사랑할 수 없다. 人間이 자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찌 진정한 幸福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자의든 타의든 또한 그 어느 것도 아니든지 나는 生을 부여받았다. 하여 나는 괴로움에 떨고 있다. 왜.

일생동안 自足과 감탄과 즐거움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것을 幸福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지저귀는 새소리, 꽃의 향기와 빛깔에 그들은 왜 그렇게 매료되도록 정신을 못 차리는가. 발가숭이로 태어난 새, 그 발악하는 듯한 긴장된 눈, 굼벵이를 찾아 흙을 쪼아대는 그 주둥이에서 나오는 그 울음이 과연 幸福의 표시인가. 그들은 자기 본위로 해석하고 있다. 내가 生을 부여받았다고 生 자체가 귀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 性交없이 탄생되는, 原動力없이 발아되는 그러한 生命이 있다면! 들로 나가자. 그러면 나는 쓸쓸함을 느낀다. 存在에 불쌍한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처량함을 느낀다. 나는 나의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1973/11/27


방을 나섰다. 겨울의 문턱을 넘어 선 대기는 그 쌀쌀한 감촉을 옷을 뚫고 전해주고 있었다. 며칠만의 외출이지만 나의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은 모두가 새로운 빛으로 채색되어 있는 듯 했다. 방안에서 혼자라는 것을 되뇌이는 것 보다는 이렇게 많은 存在들 사이에서 홀로 걸을 때 그리고 저 사물들이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 인식될 때 아 그 때 나의 고독은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인가.

외로움이 한껏 폐부로 파고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목을 파고들고, 눈을 들면 구름 한 점 없이 차디찬 하늘에서 태양이 눈부시도록 빛나고 있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가로수들, 역광을 받아 더욱 침침하게 보이는 집들이 대지 위에 무겁게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홀로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 갈 수 있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혼자 걷고 있었으나 고독하지는 못했다. 나는 어디서고 만족할 수 없었다. 저 存在들이 나의 감각을, 思念을 붙들고는 나에게로 돌려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우뚝하게 솟아 있는 남산 탑이 그 둔중한 모습을, 어찌 보면 나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와야 할 그 모습을 예외 없이 던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만 싶다. 산에라도 올라가서 석양의 서울을 바라보고만 싶다. 내가 무엇을 느낄 것인지 알지 못한다. 허나 어둠 속으로 젖어들 대도시의 풍경을 나는 나의 마음속으로 맞아들이고 싶다.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표정이, 사물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귀가 있다면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인식은 철저히 사물의 외피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다운 精神의 희열은 神의 소리를 듣는 자만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고만 싶다. 내가 사랑할 대상은 무엇이면 좋을까? 찾지 못할 것만 같다. 아, 허공을 맴도는 의식이여. 神의 소리가 숨겨진 그 무엇 위에 내려와 앉으라. 나의 갈망은 오직 그것뿐이니 幸福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체험이다. 現象의 온갖 것을 소유할 생각은 없으니 나에게는 오직 하나 眞實 뿐이었다. 너희들이 조롱할 줄 안다. 그러나 난 너희들을 멸시한다. 삭막한 사막 위를 걷는듯 나는 피곤해졌다. 모든 것이 헐벗은 채 방랑하는 자의 허드레 옷과 같아 보인다. 쓸쓸한 광경이었다.

나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좋아한다. 현 위에서 뛰노는 막대를 상상할 때면 괜히 들뜨기도 했다. 현이 끊어질듯 솟아오르는 고음을 아끼고 부드럽게 파도쳐 오는 저음을 또한 좋아한다. 간결하면서 화려하면서 아름다운 것. 그대가 베토벤을 좋아 한다면 그대와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대가 모짜르트를 좋아 한다면 그대와 걷고 싶다. 그리고 그대가 眞理를 사랑하는 자라면 나는 그대를 부둥켜 안고 싶다. 自然의 美를 느끼라고 강요하지 말라. 幸福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가장한 허물을 우선 벗어라. 孤獨과 苦惱에서 歡喜에로. 이것은 感傷的인 말이 아니라 나의 진심의 소리다.

극장으로 들어섰다. 암흑이 좋았다. 막간에는 노출되는 외따로 떨어진 나의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 自存 當爲性을 발견해 보려고 애쓴다. 오스몬드의 음악이 들리고 화면에 나타나는 붉고 푸른 원색의 슬라이드. 그 선명함에 나의 시각은 홀리는 것만 같았다. 조그만 행복. 순간의 가치. 어두움 속에서 순간은 반짝 반짝 빛난다고 누구는 말했었다. 그 순간이 지금 나에게 행복해져 보라고 눈짓하는 것만 같았다. 幸福! 안 돼. 지금 그것을 받아들일 순 없어. 이렇게 나의 理性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自足은 얼마나 위험스러운 짓인가. 영화가 시작되었을 땐 이 모든 것으로 부터 거의 떠난 것만 같았다. 챨스 브론슨의 매력. 언제 보아도 그 녀석의 쭈그러진 얼굴과 조그만 세모눈이 웃을 줄 모르는 입과 함께 인상적이거든. 그 녀석은 잔인과 인정과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감각을 자극하기에 강렬한 것들이다. 영화가 끝나면 다시 무로 돌아간다. 다시 과거로 내 팽겨진 듯 시간은 아무 흔적도 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을 붙잡을 수도 궤도를 벗어날 수도 없는 나는 부르짖어야만 할 것이 아닌가. 이상하고 미숙한 나라고 생각했다. 1차원의 시간과 3차원의 공간에서.

자 이젠 일어나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디 가도 靈魂은 슬퍼할 것이고 그러나 쓰라린 영혼을 애무해 주고 싶다. 어디서 眞理의 샘물은 솟고 있는가. 나의 영혼을 위하여 꼭 찾아내야만 한다. 시간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날씨는 더욱 차가워진 것 같았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싸늘하고 칙칙했다. 변한 것이라곤 조금도 없이 나는 외면을 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이 나를 덮치는 것만 같아 나의 몸은 점점 왜소해 지는 것만 같았다.


1973/11/28


자신의 性格에 관한 문제로 고민하는 人間만큼 가련한 存在가 또 어디 있겠는가. 運命이라는 고차원적 용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런 것은 人間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性格의 불완전성을 사회성 속에서 찾고 있다. 타인과 아무 거리낌 없는 교류가 잘 이루어질 때 그들은 그것을 좋은 性格이라고 말할 것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 世界는 이 地球만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性格의 異常을 자랑하리라. 저 現實中心的인 思考의 人間들과 융합되지 못한다는데 큰 다행으로 여기리라. 그것은 나의 도피처가 아니다. 낙서를 하면서 문득 이렇게 적어 보았다. ‘人生은 까마귀의 울부짖음!’ 그 더러운 무리들 사이에서 흰 백로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精神도 아니요, 肉體도 아니요, 人生 그 자체인 것만 같다. 언젠가 친구와 現實과 理想에 대하여 논쟁을 한 일이 있었다. 옆에 있던 酌婦의 말이 “아저씨들, 자꾸 현실 현실 하니까 이상하네요. 내 이름이 현실인데” 오, 너의 이름이 그러니까 이런 팔자인가 보다. 어서 이름을 갈아야 하겠어. “내 이름은 말이야, 理想이라고 해”

이젠 理想과 現實보다도 나의 觀念은 고정된 의식 없이 허공을 도는 것만 같다. 나는 막연감을 느낀다. 하품이 나면서 몸이 노곤해 지고 건너지 못하는 강의 한가운데에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있으면 붙잡으려는 것이 人間의 심정이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救援받기를 거부한다. 주위로는 무수한 대상들이 흘러가지만 나는 보고만 있다. 허무한 것들. 나에게는 目標가 있을 수 없다. 내가 집착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느낀다.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방학에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허나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삶이란게 무엇인지 그 안개를 맛보고 싶어. 虛無하면 나는 허무해 질 것이고, 歡喜라면 나는 환희일 것이다. 生이란 그 얼마나 미묘한 모나리자의 미소인가. 지금은 베토벤의 운명 4악장이 울리지만 아무 감동도 없다. 변화무쌍한 감정이 심술을 부린 것일까. 苦惱, 苦痛, 虛無, 외로움, 쓸쓸함, 孤獨.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비통해지고 싶어라. 도통 알 수 없다. 내 자신이 무엇인지를.

학원은 소요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말했다. ‘人間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自由를 누리지도 못하면서 더 많은 自由를 달라고 울고만 있다’


1973/11/29


잠에서 깨어나니 벌써 하루가 가고 있었다. 하품이 난다. 아침마다 기대하는 찬란한 하루는 퇴색된 환영으로 변하고 나는 막차를 놓친 사람과 같이 멍하니 時間을 바라보고 있다. 時間은 나를 뿌리치려는 듯이 앞으로 달리기만 하고 나는 어떻게 하여 시간 위에 精神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時間은 무제한적이며 무차별적이며 시간은 그저 흐르는 것. 모든 것을 품고서. 어느 것도 거기에는 거역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1973년 11월 29일 19시 20분임을 알고 있다. 人間은 이와 같이 時間을 토막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연속인 것인데. 아, 時間의 시초와 종말을 상상할 수 있다면.... 時間의 정지를 또한 그려볼 수 있다면. 宇宙의 파멸이 時間의 끝일 수 있는가. 萬象의 스톱이 時間의 정지일 수 있을 것인가. 時間은 절대적인 것. 人間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時間을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다. 時間은 권태와 불안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러고도 時間은 미묘한 것이다.

時間은 영원토록 불가사의한 것. 時間은 아프리오리한 存在이다. 그러기에 時間은 人間이 知覺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 아닌 것이다. 時間은 저 멀리에서 모든 것을 拘束한다. 時間을 떠나서 무엇이 남을 수 있을 것인가. 無조차 존재할 수 없는 世界. 時間이 아니라면 人間은 神일 것이다. 物體는 곧 時間이며 나도 결국 時間으로 귀착되고 만다. 아, 時間이 좀더 예리하게 빛나 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자신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으리라. 時間은 극복해야 될 것이면서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저에는 시간이 있으며 모든 문제는 시간으로 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본다.

오늘도 황혼은 찾아오고 어둠은 대지를 덮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피곤해진 육신들은 집을 찾는다. 時間은 계속하여 흐를 것이다. 죽음은 시시각각 가까와오고 人間은 내일을 위하여 잠을 잔다. 無知한 動物로서. 그래도 時間은 계속하여 흐르고 그러면 새벽의 여명은 찾아 올 것이다. 人間은 바쁘게 제 갈 길을 찾아 나선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으켜 주지 않는다. 낮과 밤과 함께 일정한 규칙성이 人間에게 행동을 강요한다. 태양은 중천으로 떠오르고 다시 서산으로 기운다. 반복되는 무서운 現象. 무뎌진 감각으로 人間은 행복하게들 살아간다. 실은 그들이 얼마나 不幸한 存在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면서 그들의 肉體와 精神은 병들고 一生은 흙으로 덮인다. 그래도 時間은 흐를 것이다.


1973/11/30


그대 친애하는 C에게 씁니다.

흰 눈 나리는 가로수 길로 그대와 함께 걸을 때 그대의 따스한 입김에 나의 가슴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읍니다. 그대의 다정한 미소와 사랑스러이 울려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나의 감각은 마비되고 오직 그대에게만 열려져 있었읍니다. 또한 그대의 눈가를 맴돌던 야릇한 미소, 그 눈웃음을 바로 쳐다보기가 나에게는 얼마나 거북했던가요. 그 때 나는 그대를 껴안을 뻔 했읍니다. 오, 나는 그대 곁에 있을 때만이 고뇌를 잊게 되고 나의 가슴은 환희로 가득 찹니다. 그대의 고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나의 찢어진 정신을 꿰매는 신비의 바늘이었읍니다. 그대 곁에 있을 때에는 저 무시무시한 현실 세계를 상상해 보지도 못했읍니다. 오직 그대를 만난 것에 뜨거운 눈물이라도 흐를 듯 나의 마음은 감격 그것이었읍니다.

사랑하는 C!

나는 외롭고 슬퍼집니다. 갑자기 뭍으로 튀어 나온 물고기와도 같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나의 정신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읍니다.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고 막혀진 갱내에서 탁해져 가는 공기를 마시며 몸부림치는 광부와도 같이 나의 정신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읍니다. 아, 저 거대한 형상으로 나에게 덮쳐오는 현실계의 모습. 나는 이제 거기에 오한을 느낄 정도로 몸서리쳐 집니다. 무섭읍니다. 시커먼 모습으로 온통 의무로 둘러싸인 괴물은 나의 꿈에 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고 있읍니다.

한 때 이상의 횃불이 나의 앞길을 비쳐주고 그것은 곧 나의 여로의 좌표가 되었읍니다. 나는 어린 아이의 순진한 즐거움으로 거기에 매달렸읍니다. 나의 사랑은 理想이었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눈멀게 한다고 했듯이 나는 나의 주위로 무한대에 까지 퍼져 있는 암흑을 보지 못했읍니다. 가장 먼저 인식했어야 할 그 암흑을 나중에야 알아차리고 발버둥쳐 봤을 땐 나는 이미 좌초되어 있었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C!

인생은 이론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대가 그다지도 강조하던 그것이 이제 나의 눈앞에 까지 닥쳐왔읍니다. 진리는 저 미지의 산골짜기, 커다란 바위에 눌려 간신히 자라고 있을 이름 모를 풀과 같이 외롭습니다. 억압을 받고 있는 진리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결심하고 나는 고독의 길로 나섰던 것입니다. 아무도 따라와 주지 않는 진리를 찾으러 나선 길. 그 때 황금같이 찬란하게 빛나던 형이상학의 세계, 아니 지금도 역시 다다를 길 없는 저 하늘에서 빛나고 있읍니다. 그 사랑하는 나의 神 앞에서 귀 먹고 눈 멀은 나는 神을 찬양할 송가를 불러야만 했읍니다. 나는 고독해 지기를 바랐고 정신은 고뇌로 가득 차기를, 그리하여 언젠가는 환희로 뒤덮일 날을 기대했읍니다. 인생은 버려진 헌 신짝처럼 밟혀지고 인간은 동물이 되었다 神이 되었다 나는 사상의 홍수 속을 헤매고 있었읍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부르짖었어요. “언젠가는 진리가 발견되리라. 자신은 속일 수 있지만 진실을 속일 자는 없다” 그러나 회의에 잠길 때도 있었읍니다. 인간에 의하여 파악되는 진리는 거짓말이다. 고로 일생은 궤변 속의 삶이다. 허나 나는 나의 행동에 자위를 할 때도 있었읍니다. 번갯불과 천둥이 수차례 머리를 때렸읍니다. 그 때마다 나의 정신은 재탄생하는 것 같았고 새로운 인식에 얼마나 가슴 흐뭇해 했던가요.

그러나 사랑하는 C!

그대는 이해할 것입니다. 흐뭇함 속에 감춰진 고통과 비애를. 또한 나는 나의 인식이 선명한 지식의 체계가 되지 않기를 바랐읍니다. 세계의 비밀을 밝혀 주고는 단지 사라져 버리기를 기구했읍니다. 아, 그러나 하늘을 바라는 나의 정신은 어떠한 양식에도 만족할 수 없었읍니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시면 더욱 더 갈증을 느꼈읍니다. 그득하게 가슴을 채우는 포만의 기쁨은 어디서고 구할 수 없었읍니다. 세계의 부조리성이 간간이 떠오르고 모든 것은 파라독스라는 사실을 느꼈을 땐 체념의 상태에 까지 들어갔었지요. 인식과 존재의 문제는 일보 후퇴하고 인생의 쓰라림이 피부로 느껴오기 시작했읍니다. 순수, 이성 등 사랑했던 단어들은 점점 멀어졌읍니다. 강요하듯 달려드는 그것은 책에서 손을 떼게 하고 멍하니 나의 가슴은 텅 비고 권태 속으로 빠져 들게 하였읍니다. 로깡땡의 의식이 밀착해 오는 것만 같았읍니다. 그러나 나의 초라한 의식에 얼마나 짜증을 내었으며 위대함을 바라는 무의식에 또한 얼마나 불쾌감을 느꼈던 것인가요. 그것은 또한 자신의 문제로 방황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땅 속으로 침몰해 버렸으면, 대기 속으로 증발해 버렸으면, 이 악순환의 아이러니에 진저리가 났읍니다. 감각계로 들어오는 현상들보다도 내 내부 세계에 더욱 구역질이 났읍니다. 이제 외계는 정착된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이때까지의 나의 의식은 자력에 끌리듯 흔들리기 시작했읍니다. 나는 다시 두려워 집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하여 주는 사랑하는 C!

그대는 훌륭한 길을 걸어갑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게 납득시키고 있으니까요. 자존 당위성을 발견하려는 나의 노력이 헛되게 끝나고 말 것인지, 눈을 감으면 무섭게 몰아치는 겨울의 돌풍이 가슴을 얼게 합니다. 저 진리를 향하려는 욕망으로 활활 불타던 나의 가슴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C!

그대의 눈을 들어서 어두워진 하늘을 보십시요. 거기에서 그대가 사랑하고 있는, 추위에 떨 듯 홀로 반짝이고 있을 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매서운 추위라도 그 빛을 끄지는 못합니다. 먹구름이 에워싸도 별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별을 그릴 줄 아는 외로운 사람이 되고 싶읍니다.


‘나는 기도드리고 싶다

온 별들 가운데 하나만은

정말 아직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아는 것만 같다

어느 별이 홀로 지속해 왔는가를-‘


사랑하는 C!

그대는 나에게 청춘의 정열을 가르쳐 줍니다.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드높은 용기를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그대는 또한 어떠한 운명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은 관용성을 갖고 계십니다. 황혼의 세계에서 삶의 조락을 느끼며 새벽의 이슬을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느낄 줄 아는 그대는.

사랑하는 C!

당신만이 나의 가슴에 다시 정열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대의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나는 결코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理性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의식은 혼미할 지라도 그러나 나는 삶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나의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고뇌가 있고 고독이 있는 길로 다시 들어서렵니다.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자아 부정을 하며 생의 문제로 고민할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철저히 나 자신이며 전혀 객관적 판단의 밖에 위치하고 있읍니다.

사랑하는 C!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대의 이상은 또한 나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C!

떠오를 태양을 기다립시다. 어느 이름 모를 호숫가에도 용이 되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자신을 성숙시키고 있을 뱀이, 알려지지 않은 뱀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1973/12/2


어제처럼 갈등 속을 헤맨 적은, 나 자신의 비참함에 몸서리 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잠 오지 않았던 쓰라린 밤. 이불을 끌어안으며 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흐느껴야만 했다. 그저 답답할 뿐. 잠깐 눈을 붙인 동안에도 악몽에 시달리다.

찌뿌린 아침이다. 나에게로 무겁게 닥쳐오는 저 구름덩이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나는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아, 무엇이냐?


1973/12/3


Y씨에게

겨울의 사나운 바람 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동안 주님 안에서 보람찬 생활이 되었겠지요. 몇 주간 교회에 출석치 못한 것이 허공에 뜬 듯 생활의 리듬을 잃었읍니다만 홀로나마 자신을 일깨워 보려는 노력이 그래도 무언가 망설임을 남기고 있읍니다.

전번에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는 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읍니다. 자, 전원 가운데서 서설을 맞는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요. 눈은 그치고 그것은 바로 異世界였읍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은 웬지 답답한 느낌만을 줄 뿐이었읍니다. 첫 눈이 내린다는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시적 감흥을 일으킵니다만 그러나 나의 텅 빈 내부가 반사되어 나오는 듯하여 창문을 닫았읍니다..........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할 나 자신이기에 또한 나는 고뇌의 이 순간을 아끼렵니다.


1973/12/5


자기 내부의 城을 쌓고 그 속에서만이 성숙해 나간다는 사실은 실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이때까지 확고한 것으로 믿었던 자신의 城을 허물고 人生의 多樣性에 접할 수 있도록 認識의 문을 활짝 개방하여야만 하지 않을까?

理性이란 또 얼마나 위험스러운 물건인가? 人生과 世界의 전부를 파악하는데는 우리의 理性의 역할은 너무나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일부문에 대한 전문성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人生은 理性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人生은 人生 그 자체의 본질, 그것을 지니고 있으며 人間 理性이 그것을 인식하기란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理性은 폐쇄성을 띠고 있으며 理性의 미오를 바로 잡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안스럽게 한다.

방 안에서 창을 통하여 하늘을 쳐다 볼 때 하나의 별이 보인다 하자. 그러면 나는 곧 거기에 사로 잡혀서 그 별이 세계의 유일한 것인 양 미혹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문을 열고 밖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알아차리리라. 世界는 하나의 별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무수한 별의 복합체이며 방 안에 있는 자들은 얼마나 큰 망상을 품고 있는가를.

自我를 깨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관용성이 필요한 때다. 人生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人生 진실의 모습을 보자면 自我로 부터의 탈출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1973/12/6


人生이란 진지한 것. 섣불리 인간 입에 오르내릴 수 없는 숭고한 것. 지나가는 헬리콥터의 웅웅거림이 귀를 울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가냘픈 기차의 기적 소리. 모든 것이 다시 조용해지고... 현실계에서 들려오는 소리. 거부의 몸짓이 잠시 주춤한다.

眞實이란 무엇인가? 生命 자체는 思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함 그대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아무리 거기에 임의로 채색한들 진실됨을 은폐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認識의 길이란 얼마나 어려우며 그 출발은 또 얼마나 고뇌를 동반하여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도취되는 위험한 자신의 울 안. 그것은 또한 참된 認識으로 향하는 밑거름이 된다. 만약 참된 認識이 현실로 복귀하는 대중성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파멸이리라. 가늘게 뿜어져 나오는 숨결에서 삶의 환희를 발견하든 삶의 고통을 찾아내든 삶 자체는 조금도 변형될 리 없는 것이다. 모두가 삶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 요소. 일원적 해석이 가능한 곳이란 찾아 볼 수가 없다.

아, 은빛같이 흐르는 달빛으로 목욕하고 싶어라. 온통 나의 내부를 깨끗이 씻어 내고만 싶다. 잠 못 이루는 밤, 고독의 아픔은 또 다른 나를 위한 잉태의 고통이 될 것이다. 나의 갈망하는 입술은 아직도 타 들어가고 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한다. 커다란 기대가 있다. 흔히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는 기대들이.

現實의 욕망 저 편에 더욱 깊숙히 숨겨진 제2의 쾌락. 나의 精神만은 영원히 眞理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굶주림은 또한 나의 願이다. 포만 뒤에 오는 것은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 또한 영원해야 하며 충실성이 있어야 한다. 경멸도 또한 사랑의 일종임을 알아야 한다.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또한 경멸할 줄 알기 때문이다.

나의 길은 빛의 길이기를.


音樂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란, 純粹한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란


흰 눈은 내린다. 아, 얼마나 고대하던 순수함이었던가! 그것은 쌓이면서 과거를 덮고 새로운 世界를 창조한다. 白雪의 世界. 그러나 파릇파릇 돋아 날 봄을 위하여 눈은 녹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부정으로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世界를 위하여 옛 것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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