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8/3
(持續의 原則)
모든 現象은 對象 자체로서의 持續的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또 持續的인 것의 規定이며 對象이 存在하는 방식인 可變的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生産의 原則)
生起하는 모든 것은 어떤 것을 前提하며 그것에 뒤쫓아서 하나의 規則에 따라 繼起한다
이것의 認識은 a priori한 表象으로 돌려야겠다. 當爲를 證明한다는 것은 當爲에 맞게 채색하는 論理的 誤謬를 범할 可能性이 恒存하기 때문이다
몽테에뉴錄에서 「賢人이란 정반대의 行動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行動뿐만 아니라 思想까지 포함시킨다면 정곡을 찌른 틀림없는 鐵則이 될 것이라 믿는다. 雜多한 知識만 알고 있는 자가 賢人이 될 수 없고 그 知를 理解, 자기 것으로 消化하여 확고한 자기 思想을 완성한 信念을 가진 자만이 賢人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몽테에뉴는 賢人이다. 信念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信念의 存在 與否가 重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바람에도 動搖하지 않는 굳센 意志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굳센 人間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微風에도 흔들거리는 자는 알고 있는 知識이 오히려 그 動搖를 促進한다. 거기서 우리는 갈대와 같은 軟弱한 人間을 보게 되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信念을 찾아서-.
문고판 「러셀과의 對話」를 샀읍니다. 表紙에 그려져 있는 데상이 아주 印象的이군요. 빼빼 말라 주름진 얼굴, 목덜미를 덮는 長髮, 그러나 한 곳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 한 손에는 빨뿌리가 들려 있읍니다.
思索으로 일생을 살았던 哲人의 偉大한 모습, 그것입니다. ‘哲學’章에서 靑天霹靂같은 句節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그다지도 바라고 원했던 ‘確信’과 ‘信念’-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누구나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確信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確信을 갖는다는 것은 곧 誤謬를 범한다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確實性을 가질만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모든 信念은 어떤 疑問의 要素와 함께 가져야 하며 그러한 疑問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行動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確信과 信念을 구별하여 사용한 것 같습니다. 「確信은 誤謬를 범한다. 疑問 가운데의 信念이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 人間의 能力으로서 疑問의 暴風 속을 信念의 배를 타고 破船하지 않고 무사히 航海를 끝낼 수 있을까요? 疑問입니다. ‘確信은 필요 없다. 行動할 수 있는 信念을 가져라’ 앞으로 더 깊이 熟考해야 하겠읍니다.
‘宗敎’章은 그 問題에 대한 나의 滯症을 씻어줄 만한 興奮의 章이었읍니다. 나의 속을 表現해 내지 못한 것을 그가 대신 喝破해 준 것 같습니다. 懷疑 속에서 이때까지 크리스챤과 交際를 가져 왔읍니다. 그러나 이 懷疑를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나의 無知인 것만 같아 부끄러워 해왔던 것입니다. 초기에는 人生에 있어서 信仰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죠. 하느님의 恩惠요 새 生命을 얻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色眼鏡을 쓴 것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모든 것을 神에게 빌었읍니다.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내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그러나 나는 여기서 모든 것을 神에 의지하는 여기서, 人格의 尊重이 아닌 人間 價値의 下落을 발견했읍니다. 宗敎는 單一을 요구합니다. “道德 자체의 眞僞는 제쳐 놓은 채 어떤 것을 믿는 것은 옳고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道德的 異端을 樹立”하였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宗敎는 有害하다고 까지 말하고 있읍니다. 내가 가장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宗敎는 自由로운 人間 思考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젠 神의 存在까지 疑心되고 “肉體가 分解되어 버린 때에도 精神이 存續한다고 생각할 理由는 전혀 없다”는 말에 - 물론 더 생각하여야 겠지만 - 同調할 可能性마저 있읍니다.
人間은 “神의 慈悲에 대한 證據가 아무 것도 없을 때 神의 慈悲를 믿고, 世上 일이 잘 되어가서 神의 慈悲를 믿어도 좋을 때에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人間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힘으로 “人生이 부여해 주는 것을 가지고 人生에 대처해 나가는” 勇氣를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크리스챤의 不寬容과 排他的인 行動, 敎會의 低級은 나를 더욱 失望시킵니다.
人間의 想像力을 超越한 어떤 것으로 神을 迎接하는 것은 나에게 있을 수 없고 宗敎 없이도 幸福해 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宗敎는 人間 恐怖에 대한 社會的 習慣이며 社會 問題가 해결되면 宗敎는 消滅할 것이고 信仰人은 비겁자”라는 러셀의 말이 친근감이 느껴지고 그 말을 믿게 될 날이 올지 모르겠읍니다.
1973/8/4
幸福- 이 主題는 러셀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信念을 찾아 나아가는 나의 努力도 결국 이 幸福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겠읍니까?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은 너무나 幸福스러웠지요. 그러나 그 때는 幸福을 몰랐읍니다. 知能이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人間이란 본래 幸福을 感知하지 못하고 歲月이 흐른 뒤에야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는지 모르겠읍니다만 그 때는 단순한 幸福이 있었던 건만은 틀림없읍니다.
過去는 흘러간 것, 現在와 未來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幸福이란 무엇인가요? 사랑을 받을 때, 尊敬을 받을 때 幸福을 느낍니까? 幸福은 순전한 우리들 자신의 精神作用의 일종이라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으로서도 幸福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三者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만의 精神世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悟性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幸福의 所有 여부가 결정되지 않겠읍니까?
주위 사람들의 자신보다 더 나음을 猜忌하지 않고, 자기의 조그만 즐거움이라도 그것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할 때.... 러셀은 幸福의 4要素로 健康, 對人關係, 일의 成功, 財産을 들고 있읍니다. 病弱한 가운데서 幸福이 있다면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滿足일 겝니다. 對人關係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自我를 사랑할 수 있으며 그것은 幸福으로 통합니다. 일의 成功은 물론 幸福을 가져다주겠죠. 그러나 人生에서 실패할 확율이 더 크다는데서 일이 成功치 못했다 하여 不幸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思慮가 아닌가 싶습니다. 財産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지가 되지 않을 정도의 生活만 되면 幸福은 자기 意思에 달려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봄을 찾으러 나갔다가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자기 집 마당에서 봄을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示唆를 해 주고 있읍니다. 幸福은 무지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면서 幸福하게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머리 좋은 不幸한 자가 되겠습니다. 결국 나의 목표는 知識 속의 幸福으로 歸着될 수 있읍니다.
1973/8/5
林語堂의 문장은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그의 유유자적하면서도 人生을 감미롭게 즐기는 敍情詩的인 思想도 나의 가슴 속에 숨어있는 듯한 鄕愁와도 일치하는 듯 잔잔한 感情의 물결이 와 닿는다. 같은 文化圈의 傳統이 그와 나의 共感을 이어주는 것만 같다.
西洋의 어렵고도 딱딱한 哲學書를 그는 批判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가 더 非難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生活의 방법을 알으켜 줄 수 있지만 理想主義的인 그의 思想은 現實 世界에서 얼마만큼이나 적용해 나갈 것인가? 그가 知的 慾望의 결과인 기타 哲學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林語堂의 絶美의 문장, 中國의 思想을 이어받은 生活 態度. 그러나 그가 靑年 시절에 벌써 그와 같은 人生觀을 확립하고 실천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격동의 靑年時에 그를 배우라고 말하지는 못 할 것이다. 만일 그가 참된 人生 達觀者라면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할 것이다. ‘彷徨하라. 끝없이 探索하라. 그러면 너의 길이 발견되리라’
學. 行, 識이 三位一體가 되어야 見識있는 교양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읍니다. 이 셋이 합해져 있는 상태를 무엇이라 하는지 모르겠읍니다만 만약 知라고 부를 수 있다면 知까지 도달하는데는 긴 時間과 自我와의 싸움이 있어야 되겠지요.
知가 尊重되고 最高 理想으로 되는 社會가 到來 가능할까요? 아마 人性이 바꿔지지 않고는 거의 不可能한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런 社會로 志向해야 되겠고 最高 道德社會에 가까와지도록 努力해야 되겠읍니다.
現代는 流行歌의 시대입니다. 知에 대한 討論이나 思索은 무시되고 순간의 快樂을 쫓아 모였다 흩어졌다 하고 있읍니다. 젊은이들은 無聊함에 反抗하고 快樂이 있으면 精神없이 興奮하고 있읍니다. 人間이란 본래가 惡하고 詛呪받은 動物이라고 평한다면 너무 극단적인가요. 우리들은 本性에 비하면 훨씬 善하다 할 수 있는 社會性에 영향받아 善을 追求하고 知를 찾아 彷徨하게 되는 것인가요.
너무 어렵고 기분에 左右되는 問題라서 팔수록 自信이 없어집니다. 허나 人間性은 원래 善하다고 볼 아무런 根據도 없으므로 그 확율은 매우 적다고 생각됩니다. 홀로 自我와 피투성이의 鬪爭을 하는 한 人間은 孤獨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오는 또 다른 것을 믿기 때문에 그는 幸福할 수 있읍니다. 어리석은 大衆과는 感情의 交流를 막아야 합니다.
1973/8/7
人間의 本性이란 과연 存在하는 것일까? 각자는 天性을 타고 태어나서 그것이 人間의 性格과 個性의 근본이 되고 社會的 環境의 影響은 미미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人間은 태어날 때 白紙와 같아서 자라남에 따라 自然 社會의 影響을 받아 그의 品性을 형성해 간다고 볼 것인가?
千差萬別의 人間에 관한 이 問題의 解答은 人間에 대한 깊은 洞察 후에나 발견될 성질의 것이며, 그러고도 確證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직감적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悟性에 의한 想像力을 쓰더라도 現在로서는 多樣性 있는 表象조차 없으니 거의 不可能하다.
우선 우리에게 즉 우리 性格에 절대적으로 影響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그것이 좋은 面에서든 나쁜 面에서든- 한 要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抽象槪念이겠지만 그것은 나의 生活에서 언제나 知覺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先天的이었나 後天的이었나를 따져보자. 여기서 우리는 단단한 壁에 부닥칠 것이다. 허나 우리는 다음 假定을 세우고 問題 解決을 꾀해야 할 것이다. 즉 만약 人間에게 本性이 주어져 있다면 人間은 그 本性을 마음대로 左右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하나의 要因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本性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人間에게는 각자의 宿命的인 性格- 本性이 있다고 믿는다. 社會的 環境의 영향으로 그것은 점점 깊이 숨어 들어가고 우리는 그것을 知覺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純粹 本性만을 認識할 수 있다면 여기서 얻는 결과는 어떤 것인지 想像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다. 허나 不幸하게도 그런 일은 不可能하다. 나는 숨겨진 人間 本性이 善할 것이라 믿고 있다. 社會的 영향을 제외한 各人의 個性은 이 善 위에 건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經驗으로 얻는 善의 行動은 우리의 本性을 奮起시키지만 感官을 통한 기타의 모든 영향은 우리의 善한 本性을 깊숙히 억눌러 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現代의 社會 制度는 人間을 人間답게 하지 않는 중요한 沮害 要因이다. 앞으로 더 완벽한 社會 制度가 出現하여 劃一的인 人間 生産品을 産出한다면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1973/8/11
中性的인 人間- 男子가 男子답지 못하고 女子가 女子답지 못할 때 그것만큼 보기 싫은 꼴은 없겠지요. 반대로 男子가 男子다울 때, 女性이 女性다운 行動을 할 때 우리는 거기서 魅力과 남을 끄는 美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나를 돌아볼 때 분명히 男子이면서도 비겁한 行動과 프라이드가 없어 아무 일에나 낯을 붉히는 못난 行動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驕慢하여 져서 나만 잘난 척 하는 것도 할 짓이 못됩니다만 그러나 비굴하여져서 아무 勇氣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디서 삶의 보람을 찾겠읍니까? 나의 意志와 行動은 나 자신이 교정해 나가야 되겠읍니다. 우선 마음속에 언제나 나 자신을 고치자는 欲求가 存在하게 해야 겠읍니다. 사소한 感情 表現은 얼굴에 나타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다음에 行動으로 옮겨야 겠읍니다. 만약 마음에 크기가 있다면 나의 것은 축소되고 축소되어서 콩 알만큼 되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나는 확- 펴져 있지 못하는 나의 좁은 마음에 울분을 느낍니다. 이것은 身體와 같이 단련할 수 있다고 保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天性으로 타고난 것이라 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S는 外的 行動의 변화에 情熱을 쏟고 있읍니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內的인 面에서 나를 育成시키려 努力하고 있읍니다. 內的 完成은 곧 外的 行動으로 나타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現在의 나를 벗어 던지고 언제쯤 새로운 나의 탄생을 볼 수 있게 될 것인지, 그 時間까지 남모를 努力과 自我 完成을 위한 意慾이 있어야 겠읍니다. 現在가 아니라 未來를 바라보면서 未來를 위하여 살아야 겠읍니다.
1973/8/16
올 해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挑戰과 對應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年初부터 몰두했던 考試- 그동안 우여곡절의 커브를 그린 끝에 6월말경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동안 얼마나 나 자신에 묻혀서 相異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가. 나에겐 그것만이 絶對 命題같이 여겨졌고 先覺者와 같은 감정으로 生活해 왔던 것이다. 허나 환경은 인정해 주지 않았으며 5월 한 달 공치는 동안 거기에 대한 별 진전도 없이 무더위와 함께 懷疑가 찾아 왔다. 어느 초여름, 전에는 그렇게도 否定的인 宗敎에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나의 變革, 나의 모든 것을 絶對者에 맡기고 싶어졌다. 기도가 끝났을 때는 새로운 世界가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無價値, 이 길로의 삶은 喜悅로 차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엔 정말 열심이었다. 찾을 것만 같았고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개월여가 지나는 동안 전에는 막연히 믿었던 하나님의 存在, 진정한 믿음의 방법등 여러 방면에서 問題點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나 혼자 解決하기엔 너무 難解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어떤 信仰도 모래 위의 塔에 불과할 것이다.
7월 중순부터인가, 哲學을 통한 解答을 얻기로 기대하고 先人의 哲學 書籍 讀破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接해보지 못했던 魅力的인 知識의 寶庫였다. 자연히 信仰에 대해선 否定的이 되어 버렸고 無條件的인 믿음은 人間 本性에 대한 背信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무더위 속에서 讀書의 맛, 커가는 나 자신을 더욱 가꾸고 싶어졌다. 이즈음해서는 敎會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허나 뜨거운 8월, 너무나 무미건조한 生活이었다. 초순경 精神修練겸 外面 活動의 자극을 위하여 태권도에 몸을 담았다. 다른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처음이어서 그런지 역시 떨어지기 싫다. 지금의 심정은 初段이 될 때 까지는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할 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늘은 올 여름 최고의 더위 35.2℃. 더위 때문인지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哲學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가는 것인가. 아- 나란 언제나 이런 것인가. 신기한 것은 장미 같은 情熱로서 부닥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열매는 맺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니....
讀書와 運動은 絶對 命題다. 시들지 않게 언제나 물을 줄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자. 宗敎도 肯定的인 방면에서 생각해 보자. 최선의 방법은 아닐지라도 해볼 만한 방법은 되니까 말이다.
1973/8/17
from 「人間의 이모저모」
‘사람들은 하루 동안에도 자그만 기쁨이 가슴을 여는가 하면 자그만 슬픔에 左右되기도 한다. 그렇게도 짧은 時間에 그들의 마음과 머리속을 지나가는 것만큼 변덕스럽고 한결같지 않은 것은 없다. 이 病에 대한 처방은 世上의 일들을 크게 評價하지 말고 정확하게 그 값어치만큼 評價하는데 있다’
최근 나 자신 苦悶하고 느끼는 바로 그것이 이 한 文에 압축되어 있다. 이 文을 읽고는 ‘찾았구나’하는 감정이었다. ‘個人은 人間의 代表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각 個人은 어떠한 人間이 가지고 있는 性格이라도 다 가지고 있으며 그러니까 個人에게는 人間에 없는 性質이란 없으며 다만 그 混合比에 있어서만 差異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주위의 조그만 기쁨과 슬픔에 나의 기분이 좌우되어서야 어디에 나의 意志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와 같이 수많은 것의 複合된 것이 人間이란데서 변덕과 부조리의 덩어리가 바로 人間일 것이다.
라 브리예르는 처방까지 가리키고 있다. ‘世上 일을 정확하게 그 값어치만큼 評價하라’ 抽象的이고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되자면 막대한 探索 끝에 도달한 굳건한 信念이 있어야만 즉 行動의 標準이 存在해야만 되지 않을까? 아마 ‘世上 일을 정확하게 그 값어치만큼 評價’할 수 있게 된다면 이 世上에서는 尊敬받을 完人의 型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冷靜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他人이 흥분할 때 冷靜할 수 있는 者, 그는 한 次元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내가 남 앞에서 나를 숨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이다가는 쓰레기더미 같은 醜惡 그것. 이왕 남 앞에 나타낼 바에야 冷靜하게 생각하여 知性人다운 行動을 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고 木石같은 人間이 되어서는 꼴불견, 아- 世上 살기 어렵고도 어렵구나.
1 2 3 4 5 6 7 8 9 10 時間이 흐른다. 瞬間의 連續. 보고 쓴다. 時間의 배를 타고. 時間이 없다면 아무 것도 知覺할 수 없다. 미세한 變化가 큰 變化를 이루고 그리곤 또 어디로 흘러 가는가? 進步⇒進步, 그 다음엔 退步도 있겠지. 進步, 停滯, 退步의 複合作用으로 나는 存在한다. 그러나 時間은 앞으로만 흐른다. 宿命의 날을 향하여, 무서운 일이다.
人間은 人生을 너무나 無價値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찰나의 흐름에 통곡해야 할 터인데, 前人이 산 것 같이 虛無하게 산다.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더욱 불쌍한 存在들이다. 生이 길든 짧든, 來世가 있건 없건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특별한 것인가. 宗敎는 삶의 價値를 가르쳐 주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現實 逃避的.
이 世上을 뜨는 臨終時, 苦痛을 잊을 感激이 온 몸을 휩싸야 할 것이다. 아깝고도 아까운 生이었다고. 삶, 산다는 것. 死, 죽는다는 것. 죽음의 彼岸에 천당이 있든 지옥이 있든 생각할 바 없다. 오직 이 世上에서의 同類인 人間과의 삶, 그 길만이 問題이다. 보통의 人間들은 家族을 위해, 자신을 위해, 國家를 위해 산다. 허지만 人生 자체를 위해 사는 사람.
그 길은 어떤 길일까? 나의 理性에 따른 行動. 타인의 行動은 나의 指標가 되지 못한다. 價値있는 生에서 價値있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요? 그 길은 무엇일까요?
친구들은 너를 비웃을 것이다. 世上人이 너를 비웃을 것이다. 너는 거기에 견딜 自信이 있는가? 그것을 무시하고 너 갈 길을 똑바로 갈 決心은 되었는가? 世評에 價値 判斷의 기준을 두지 말라. 거기에는 값어치가 없을런지도 모른다. 너 자신 背反하지 말고 그래서 네가 너 자신과 싸우는 꼴이 되지 말고 초연히 나아가라. 世人이 不幸한 者라 稱할지라도.
1973/8/20
비가 온다. 찌들은 대지 위로 비가 내린다. 비, 눈이였어도 좋고 비라도 괜찮다. 내리고 있다. 끝없이. 점점 세어지는 빗발. 비가 흐르듯이 時間도 흐른다. 좋은 時間인데 가슴만 답답할 뿐, 생각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는다.
심한 人間間의 不平等! 强者와 弱者중 누가 진정한 强者이냐? 나약한 知性人! 현재는 弱者일지라도 나약한 知性人만은 되지 말자. 神! 그 存在에 대한 명쾌한 解答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人間 意志! 하잘 것 없는 것. 그 한계성을 너무나 잘 알면서 너는 그것을 過信하고 있지는 않느냐? 宗敎! 眞理냐? 詐欺냐? 博愛의 宗敎 基督敎, 博愛만은 괜찮아. 그러나 지금 博愛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基督敎는 번창해도 博愛는 없다. 오직 唯一神에의 盲從이 있을 뿐. 基督敎는 博愛의 精神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假面으로 내세운 敎理에서 벗어나 眞理의 敎理를 찾아야 한다.
네가 平安하뇨? no. 이런 惡의 世上에서 平安을 바란다면 christian의 自家撞着이다. 平安은 천당에서나 기대해야지. 神이 있으면 自我는 죽는다. 自我만 있다면 不安 속을 헤어나지 못한다. 거기서 벗어날 길이 宗敎밖에 없는가? 基督敎 외엔 안 되는가? 永遠히 풀지 못할 問題들이다.
神과 人間과의 對話. 世界 創造 = 人間과의 交際를 위하여. (證據者) 요한1서 5:8, 성령, 물, 피.
새 生活이라고 할까? 딴 世界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理解할 수 없는) 것이었다. 人生의 價値를 어디에 두느냐? 그들은 主 앞에서 平安을 얻었다. 人間은 꼭 平安을 가져야만 한단 말인가?
난 人間 本性을 마비시키는 그러한 평안보다는 차라리 不安한 가운데 살기를 願하니 난 여기에 잘못 들어온 背反的인 異端兒인가 두렵다. 神이 꼭 필요한가? 神이 정말로 存在한다면 왜 현실적인 방법으로 世人이 알 수 있게 출현을 연기하고 있는가?
내가 여기 참석한 目的을 다음에 두어야겠다. 즉 基督敎가 무엇인지 더 알아보고 싶어서 왔다. 平安을 얻으려면 基督敎를 통해서만 가능하단 말인가? 絶對 唯一의 眞理란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人間 價値의 低落. 난 크리스챤적 방법으로 본다면 확실히 병적이다. 마음의 문을 열으라는데 차라리 나 자신을 속이라는 말이 마땅할 것이다. 며칠간 더 생활해 보자. 찾든 못찾든 나에겐 상관없다. 아! 옹고집
1973/8/21
나는 용서받지 못할 非眞理 속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닌가? 주위의 사람들과는 융합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다시 느끼게 된다. 基督敎가 宗敎, 그럼 기타 宗敎와 다를 것이 무언가? 타 宗敎에서도 平安은 얻을 수 있다.
내 마음의 門을 개방하라. 나는 또 다른 不條理 속에 휩싸여 있지 않은가? 그 껍질이 오해와 偏見의 덩어리라면 깨뜨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神의 存在가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狂信的으로 讚揚해야만 되는가? 絶對者인 神이 미약한 人間의 찬미를 그렇게 기다리는가? 조용하고 경건한 속에서의 禮拜는 박수치고 시끄럽게 외치는 禮拜보다 主에 대한 찬미가 덜 하단 말인가?
나는 좁은 人間, 모든 것과 和合할 줄 모른다. 나는 나의 世界 안에서만 놀고 있다. 넓혀라, 眼目을 크게 하라. 너는 神에게 몰두해 볼 勇氣는 없는가? 무섭고 두려운 생각. 이렇게 不純한 마음만 가득해서는 어디 참석 안하느니만 나은 것이 무엇인가? 1주일 동안이라도 분위기에 가담하라. 非活動과 소극적인 行動을 탈피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라. 世人의 주목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너의 信을 넓혀라.
1973/8/24
결국 나는 自己 破滅로 되돌아오고 말았읍니다.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悲感을 맛보았읍니다. 病的인 나를 다시 한 번 깨닫고 보통의 人間조차도 될 수 없는 나, 모든 사람이 무서워지고 나는 그들의 종보다 못한 신세로 여겨집니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主의 실수로 빚어진 한 人間.
基督敎에 대한 批判으로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나의 병적인 性格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나, 이 世上에서 없어져야 할 나 때문입니다. 얼굴과 등으로 긴장의 땀이 흐르고 있었지요. 聖經이 든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神經 안정제를 입에 넣고 있었지요.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를 사랑해 줄 存在者는 없는가? 世上은 나를 버리고 나는 世上을 무서워하고 있읍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 봐도 나는 너무나 精神上의 異常이 생겼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읍니다. 허지만 찬양할 수 없는 나, 못난 내가 잘난 人間들 틈에 끼인다는 것은 나를 미치게 합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自信을 가지게 될 때가 올는지요? 그렇다. 나는 남과 같이 잘 생기지도 못했고, 남과 같이 사랑도 못하고, 남과 같이 음성이 좋지도 않고, 남과 보통 수준되는 것 조차 하나도 없기 때문.
넌 왜 世上 일에 그렇게 관심을 두는가? 그럼 世上살이에서 어떻게 남과 비교되지 않을 수가 있겠읍니까? 나는 남의 눈을, 나에 관한 그들의 소리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못난 人間밖에 되지 못하는가? 방학이 끝나면 친구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나의 이런 모습을 다시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不治의 그것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나는 영원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主여! 먼저 이 불쌍한 자에게 主의 은혜가 임하옵소서. 主님을 진정으로 찬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목적이 명확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넌 지금 삶의 방향을 잃고 있다.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世事를 알지 못하는 정신상의 어린이, 弱者.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맞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님! 나도 남과 같이 여호와를 의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요. 「여호와를 의뢰하라. 그러면 힘이 생기리라」「지금까지는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의 기쁨이 충만하리라」
아-! 주여-!
표면상의 이유는 이렇게 내세웠지. 人間은 創造主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現實을 외면한 狂信的인 찬양이 神의 뜻인가? 信者의 적극적 포섭, 異蹟들은 信者 포섭을 위한 방편으로 쓰이고 있지는 않는가? 경건한 宗敎心을 바탕으로 現實을 긍정하는 生活 태도가 神의 뜻인 것 같다. 聖靈이라는 기이한 物件, 사람을 迷惑 속에 몰아넣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반항했지만 결국은 자기 기만적인 생각이었고 단지 그것 때문에 나는 뛰쳐나온 것이다.
天主敎를 생각했다. 거기서는 내가 인정이나 받을 수 있는 것 같이나 말이다. 허나 딴 생각을 품고 있는 내가 거기서도 실망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시 출발해 보고도 싶다. 도중하차가 늦을는지도 몰라도 다음 열차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있으니까. 이때까지의 行動, 타인에 대한 失禮, 자기 파멸적인 생각이 모든 것을 속죄하고 잊고서 새로운 마음으로 主를 영접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아니 꼭 이렇게 하고 싶다.
他人이 이해해 줄는지? 또 이런 생각이 드는걸 보니까 나는 本性的으로 世人에게만 매여있는 그들의 평가에 自我의 價値를 잊어버린 못난 놈으로 되어 있는가 보다. 강해지자! 나를 키우자고 언젠가 결심하지 않았는가! 너도 人間이고 男子이다. 내일의 새 太陽을 맞으라. 부모님이 동생들이 보고 있다.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주시한다. 너는 그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는가? 못난 생각에 몰두하지 말자. 그것이 없어도 수많은 人間들이 世上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그것은 일순간의 기쁨이요 슬픔일 뿐이다. 너는 왜 영원의 기쁨을 외면하고 있는가? 世人이 이해해 줄 것으로 믿어라. 또 다른 自我가 외친다. 새 출발하지만 거기서는 너는 이제 만족할 수 없다. 벌써 두 달이 넘었지 않은가? 이제 또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새 出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카렛의 독백. “생각해야만 해. 하지만 내일 생각하자」 그때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순간이었지. 지금 그녀와 같은 심정이다. 못 쓸 놈의 한계 있는 人間!
1973/8/25
미혹한 世界인 것만은 틀림없다. 人間에 대한 깊은 思考도 없이 찰나를 즐기는 無事安逸主義가 횡행하고 있다. 人間은 생활 지표를 잃고 있다. 어떻게 살고 座標에 대한 모색은 부정되고 現實에 영합한 人間들만 모여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적어도 여기에 답을 가지고 있어야 그의 人生 방향도 결정될 것이다. 宗敎的으로 哲學的으로 道德的으로 무수한 답이 있을 것이다. 人間 누구나가 그 중의 하나를 택하여 뚜렷한 信念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 사회는 발전의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基督敎的 人生觀이 절대 眞理라고 믿을 수 없음이 현재로는 불행하게도 나의 심경이다. 하나 基督敎를 신봉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生의 줏대가 될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人生이 되지 말고 어떠한 도전에도 무너지지 않는 큰 바위같은 人生이 되자. 남을 위압하는 힘이 있고 남을 사랑하는 精神이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謙遜이 있는.....
이렇게 생각하면 삶이란 그렇게 쉬워 보이고 저렇게 생각하면 人生살이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죽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애통하고 슬픈 것이다」 그렇다,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언제나 절망과 비애 속에서 너 자신과 싸울 필요는 없잖은가!
現實은 當爲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굳건한 信念의 건축을 세우라. 宗敎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세상일을 정확하게 그 값어치만큼 평가하라」
1973/8/26
神이 人間을 創造한 것이냐? 人間이 神을 創造한 것이냐? 지금으로서는 절대 확신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다. 개개인의 견해에 차이가 있고 人間으로서는 證明도 명확한 認識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허나 믿음이란 人生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絶對者에 의뢰하고 人生을 幸福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福받은 자일 것이다. 그것이 속는 것이고 眞理는 딴 곳에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基督敎는 내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버려야 할 것도 있지만 그러나 좋은 점도 얼마든지 있다. 唯一하신 하나님은 他宗敎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고 계시다. 末世觀과 온통 罪와 惡으로 뒤범벅이 된 世界觀, 미친 듯한 信仰, 어떻게 보면 人間 價値가 무시되고 있는 듯한 神에 대한 依支, 이 모든 것이 구미에 맞지 않고 이해되기 어렵지만 그러나 이것도 정도의 차이 문제이다. 기쁨 가운데 神에 의지하는 生活을 가질 수 있다면, 聖經에서 즐거움을 찾고 主의 뜻에 맞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면.
이젠 信仰 문제가 나의 主 과제로 등장하였다. 人生을 생각하다보면 자연히 哲學, 宗敎 문제로 넘어가게 되나 보다. 새로운 人生觀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지금 이 때가 길이 기억에 남을 훌륭한 時間이 될 것이다.
고요히 瞑想할 수 있는 時間을 가지기가 여간해서 생기지 않는다. 아니 時間은 충분히 있다. 허나 생각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귀찮고 골치 아프고 어렵게 여겨질까? 쾌락과 空想은 즐기면서 人生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는 것은 여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억지로 할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적당한 때가 있다. 이렇게 좋은 환경과 自由 속에 놓여있는 나 자신, 부모님과 하나님께 感謝드려야 할 것이다. 自由가 지나치면 어찌 할 바를 몰라 虛無에 빠지는 적도 가끔 있지만.
창으로는 夕陽의 노을이 비치고 서늘한 저녁 바람이 귀를 간지린다. 이렇게 좋은 때에 우울로 잔뜩 찌든 얼굴을 해서야 어디 살 맛 나겠나. 모든 것이 마음가짐 탓이겠지만 이젠 人生을 음미하면서 즐길 줄 아는 방법도 길러야겠다. 친구를 만나 기쁨 속에서 대화를 나눌 줄 아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아 중심에서 벗어난 心境.
아마 가슴이 확 터진 것 같고 괜히 기뻐지겠지. 두려움을 가질만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없다. 그런 悅樂의 경지에서 살고 싶구나. 수많은 좌절과 彷徨 끝에 내가 정착할 곳은 결국 어디가 될 것인가? 년말이 되어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 볼 때 아마 가장 감격적인 73년이 되리라. 그 때쯤이면 모든 것이 감사드릴 대상이 발견되겠지.
도스토옢스키의 ‘罪와 罰’을 深讀하고 있다. 침울하고 병적인 人間들과 그에 걸맞는 분위기, 거기에 깊은 思想이 들어 있다. 내가 체험한 바 있는 그러한 虛無와 자기모멸의 像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가장 나에게 어울리는 作家이다. 그의 모든 作品을 읽어보고 싶다. ‘地下室의 手記’의 주인공은 나의 分身같이만 여겨진다(병적 요소가 차이 있긴 하지만). 人間의 또 다른 면을 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빠져있던 그것과 비슷하니 절로 그가 좋아질 밖에-
1973/8/30
「우리」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나」보다 「우리」가 우선되는 韓國人의 思考 속에는 韓國 특유의 社會的, 文化的, 經濟的 배경을 업고 있을 것이다. 이 「우리」가 民族도 國家도 아닌 바로 家門이었다는데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家門이라는 울안에 갇혀서 개인 발전인 自我의 내면화도 사회 지향적인 외면화도 가져 보지 못한 채 퇴영과 고식주의만을 낳았다.
西洋에서는 자기 발견을 통하여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이것이 사회적 발전의 모티브가 된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머리속에 아직도 家門 중심의 울안 思想이 자리잡고 있음은 韓國 사회 발전의 중요한 저해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젊음의 특성은 憧憬에 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挑戰과 개척 정신. 事後의 성공 여부보다도 미지에 대한 동경과 행동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점잖은 人間이란 젊기도 전에 늙어버린 像이다. 하나의 人間이 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자기만족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죽을 때까지 젊음의 정신을 품고 평생을 하루같이 精進과 日新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점잖다」란 이미 韓國의 이상적 人間像이 될 수 없으며 永久 靑年的인 情熱로서 求道者와 같은 무한에의 精神 啓發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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