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젊은 날의 노트(2)

샌. 2006. 8. 10. 12:21

1973/9/2


목사의 설교에서 극동방송과 권신찬 목사에 대한 비판이 신랄했다. 몇 달 전 권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 나로선 이 상반된 異見에 적잖이 당혹할 수 밖에 없었다. 비판 요지는 다음과 같다. ‘권목사는 극동방송을 통해서 무교회사상을 제창하고 있다. 그는 구원과 부활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타락했으며 목사는 ××꾼이고 헌금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는 말로서 신도를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구원과 부활에 대한 강조는 좋다. 그러나 교회로 통하지 않고 구원의 확신을 얻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교회와 목사가 좀 부족하다 하다라도 그 필요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권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는 아무 느낌도 없이 들었는데 그는 그 때 이렇게 강조한 것 같다. ‘현재의 교회는 타락하고 썩어있다. 오직 진리는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명확하게 내용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성경을 통한 깨우침을 강조한 것 같이 여겨진다.

김목사는 반대로 청년들의 성경 공부를 금하고 있다. 괜히 비판을 하다 보면 사탄이 들어 온다는 것이다. 이 두 극단적인 어는 입장도 찬성할 수 없다. 지금 나 자신 생각하기로는 진정한 크리스챤이란 착실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의 가치는 인정해야 되며 그렇다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음을 본다. 목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中庸이 가장 훌륭한 德이 아닌가 싶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낳고 서로 비판하고 싸우는 가운데 理性을 잃고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남을 쓰러뜨리는데만 몰두한다면 자기까지 쓰러지고 말 것이다.

眞理를 찾는 信仰 생활에 까지 이렇게 많은 견해 차이가 생기고 대립이 있음은 不可思議한 일이다. 누가 진정 참 길을 걷고 있는가? 人間이란 罪意識을 느끼기에는 그렇게 둔감하고 세상사에는 그렇게도 민감하단 말인가? 부활과 영혼불멸을 부정하는 神學者도 많다는데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하는가? 現世를 위하여 信仰 생활하다가도 결국 來世的인 思想에 젖어들고 마는 것인가? 모두가 人間의 한계성과 약함 때문이다. 그러기에 人間은 宗敎에 歸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3/9/4


드디어 新世界를 발견한 한 탐험가가 희열에 들떠 발을 옮기지도 못하고 감격 속에서 대지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무진장한 지식의 寶庫 앞에 서서 감히 첫 장을 열지 못하고 두려움과 기쁨에 찬 희열을 맛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좀 어떤 根源的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 이 책만 읽는다면 나도 무언가 변하고 깨닫는 바가 있을 테지. 어떻게 보면 어린 아이의 막연한 동경과 같은 이룰 수 없는 기대 같지만 나는 무슨 책을 대하든지 언제나 그런 심정이다. 무언가 변해보고 싶다는 것, 무언가 정신적 양식을 얻고 싶다는 것. 현실의 불만족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겠으나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가 아닌가 여겨진다.

남보다 뛰어나게 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강열한 욕망이나 그것이 외면적으로 별로 발견되지 않음은 다행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인간은 거기에 속고 그래서 자기 행동을 조심스럽게 타인을 고려하면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대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다. 단지 남보다 뛰어난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그 이유는 너무나 졸렬하다. 언젠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얻을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남에게는 바보같이 보일지라도 우선 나 자신 만족할 수 있는 自我를 건설하자. 信念을 가진 自由人, 이것이 유일한 生의 목표이다.


1973/9/11


며칠간 고향에 다녀왔다. 그 사이 내 心境의 변화는 또 다시 불끈 솟아오르고야 말았다. 7월부터 오늘까지 나는 宗敎 문제에만 골몰해 왔고 - 딴 것은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 그 불가사의한 解의 어려움에 얼마나 망설이고 주저했던가?

<人間的>인 것과 <人間性>은 무엇인가? <道德>과 <善>은 무엇인가? 옆의 크리스챤들을 둘러보라. 그들의 생활이 人間的이라고 생각되는가? 人間으로 태어난 이상 人間的으로 살아야 하며 그것은 또한 나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歷史의 방향은 <人間的>인 것을 상실하는 迷路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혼란과 두려움의 세대에서 수많은 사람이 宗敎로 눈을 돌리고 그 神秘的이고 오묘한 敎理와 인간 본능적인 약점으로 인하여 <人間的>인 것을 빼앗겨 버리고 딴 流星에서 온 이방인처럼 그들은 人間에서 벗어나고 있다.

人間은 人間답게 살아야 한다. 현대의 무수한 法, 制度, 道德, 倫理는 人間이 人間다워지는데 중대한 방해물이다. 人間은 自由와 平等을 내세운다. 허나 自由와 平等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自由와 平等을 주장하던 人間이 自由와 平等의 노예가 되어 있음은 우리는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뜻하며 그것은 人間的이 아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무한한 時空 속에서 유한한 人間 存在는 그나마 그들 자신 올가미를 씌우고 있다. 무한에 대한 유한의 의미는 人間의 한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不文律의 道德, 慣習을 깨뜨리고 사회제도를 배반할 수 있음은 현대의 바보들 속에서 영웅적 행동이다. 人間性은 사회제도와 도덕율에 물들어서 <人間的>인 것과 相剋을 이룬다. 이런 人間性은 간장독에나 빠뜨려 버려라. 歷史의 흐름을 획일과 단일에서 벗어난 잡다한 原始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人間的>인 것을 찾아서 나서야 한다.

전능한 神이라니? 아담과 이브가 자기의 창조물이 罪를 범하는 것을 막지도 못하면서 잘못 했다고 애걸복걸하는 人間과 영원의 그 후손들까지 고통 속에서 헤매게 방관하고 있음은 그게 무슨 전능한 神이란 말인가? 基督敎的 神은 없다. 고로 나에겐 原罪란 없는 것이다. 나와 아무 관계없이 부여된 나의 人間性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다.

이치에도 닿지 않는 虛의 神을 믿는 크리스챤이야말로 <人間的>인 것에 대한 심한 죄악이며 眞의 神에 대한 반역인 셈이다. 그들이야 말로 자신을 구제해야 한다. 基督敎的 神은 人間 이하 밖에 못되는 우리들 논외의 대상이다. 저 무한대의 공간에서 무한의 時를 통하여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는 근엄한 창조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분은 말하신다. “被造物들아! 人間的으로 살아라” 그 분은 全知全能하시지만 원초부터 우리완 손을 떼고 바라보고만 계신다. 그렇다고 치졸하게 우리를 죽여서 심판하지도 않으신다. 죽으면 모든 人間은 마찬가지, 그 靈은 肉과 더불어 영원히 滅할 뿐이다. 일부러 나를 제약하는 생활은 禁. <人間的>이란 것은 곧 自由를 뜻한다. 간섭을 하지도 간섭을 받지도 않고 自由롭게 살고 싶다.


1973/9/14


靑春은 生의 최고 단계이다. 人間의 存在와 삶의 意義를 느낄 때 그것은 곧 모순과 대립을 의미한다. 하나의 思想을 안고 몸부림칠 수 있는 靑春. 조화가 人生의 궁극적 목표라면 청춘기의 방황과 혼돈 속을 누가 더 침잠하느냐에 조화는 더욱 값이 나가지 않겠는가?

「청춘은 짧다. 보석처럼 그것을 아껴라. 卑俗과 凡雜과 야비 같은 것이 잠시인들 그것 안에 섞이는 것을 거부하고 그 思想을 위대하게 하고 그 꿈을 아리땁게 하라. 꿈꾸는 것을 멈출 때 그 청춘은 끝나는 것이다.」

人間이 肉과 魂의 결합체라면 그 두 요소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나는 思惟하기 때문에 내적 直觀에 의하여 存在하는 것이지 肉的만으로는 存在 여부는 판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人間 정신은 나의 存在의 필수 불가결이다. 그 휘황한 人間 정신은 청년기에서만 빛날 수 있으며 태양을 압도할 정도의 기개도 그 때에만 계발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나의 靑春期를 마치려고 한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靑春의 ‘젊음’을 파묻고 나이와 관계없는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살아가려는 것이 앞으로의 지향이다. 나는 나의 靑春과 작별하는데 임하여 참으로 무량한 감개에 젖지 않을 수 없다. 나의 靑春은 참으로 진지하고 뜨겁고 또한 용감하였다. 그리고 고민과 시련에 넘쳤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고민과 시련 속에서 올바로 사는 길을 알고 人間의 靈魂이 마땅히 가야 할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思想. 어떻게 살 것인가. 認識. 무한의 크기와 무한의 美를 소유한 宇宙. 그 배후에 숨어 있을 창조주의 오묘한 법칙들. 人間 존재는 너무나 가련하다. 나의 내면세계는 너무나 공허하고 나의 意識은 미묘하기 그지없다. 人間 삶이란 얼마나 엄숙하고 얼마나 진지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思想에 눈을 돌려 풍성하게 해야 한다. 흐르는 時間은 ‘애잔’이라 부르자.

生, 生, 生.

理性 認識의 한계 밖이라고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독단론은 도전이다. 회의론은 도피다. 生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언젠가는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진지하게 思索할 때만이 나는 진실로 存在한다. 人間 存在는 思索을 통해서만 表象되어 질 수 있다. 나는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나의 思想의 격동기를 맞이하려 한다.

「항상 큰 思想을 갖고 살며 사소한 일들은 경멸하는 버릇을 가지라」

「사랑과 認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뱃길을 정하고 긴 항해 후에 드디어 彼岸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둘도 없는 靑春 시절의 대학 생활이다. 훌륭한 대학 생활은 못될지라도 生의 意味를 발견하려는 성실한 노력 속의 삶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게 하자.


1973/9/16


K!

오랫간만이야. 이젠 자네와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네. 곧 다시 만나 黃昏의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면서 哲學이라 명명되는 存在를 앞에 두고 담화를 나누고 싶네.

난 요사이 生의 중요성이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있네. 남들과는 다른 정말 진지한 生을 살고 싶다는 말일세. 요전까지는 아니 지금도 나는 나 자신의 存在조차 인식 못하는 공허한 상태에 놓여 있었네. 무언가 나의 가슴 속을 쭉 훑어 내리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 채워 줬으면 하고 얼마나 열망했는지. 소나기 후의 붉은 강물의 넘실거림같이 나의 마음도 그렇게 풍성해질 수 있다면...

人生의 구경꾼이 되고 싶지는 않네. 방향도 모르고 흘러가는 人間 무리들에 역류하여 나만의 고귀한 삶, 生이란 무엇인지 맛보고 싶단 말일세. 나의 가슴 속에 묻혀 있는 보석이 빛을 발하고 그 빛에 인도되어 나는 걸을 수 있고 그리고 주위를 觀할 그 날이 곧 올 줄로 믿네.

소위 認識이란 것은 얼마나 모순 덩어리이며 얼마나 허위로 쌓여 있는가? 우리는 모든 認識을 부정해야 될 줄로 믿네. 人間이라는 프리즘은 모든 것을 왜곡하고 있지. 무한의 時間을 통해서 존재하는 物質世界, 그 내면의 비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들은 森羅萬象을 다음 셋으로 분류할 줄 아네. 즉 1)理性을 구비하고 있는 합리적 존재 2)동식물 3)無生物이 그것이지. 우리가 이 세계에서 위의 範疇를 인정하는 이상 우리는 그 認識의 대상을 우리 몸에 가지고 있다는 것일세. 1)理性的 意識 2)理性的 意識에 종속되어 있는 한 개의 동물 3)동물성에 종속되어 있는 物質.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지식이란 우리들의 意識을 다른 사물로 이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자신의 理性的 意識과 동물적 個性뿐, 그 외의 現象은 다만 보고 있을 뿐이네.

時空間을 통하여 나를 규정해 보세. 무한의 時間의 오직 한 점, 무한의 空間의 미소한 일부분, 이것 밖에 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서 나의 存在를 - 생명을 가졌다는 의식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推論해 낼 수 있겠는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정의같이 오직 나는 나의 생명을 認識하기 위해서는 理性을 최고의 단계에까지 올리는 외에 딴 것은 생각할 수가 없네. 그것은 時空의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평면상의 時空을 이탈하여 진실된 행복의 세계로 상승할 수 있는 날개를 가졌다고 믿지. 결국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現象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理性 意識과 동물적인 個性 뿐이네. 또한 生命을 가진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동물적 個性을 理性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 달성되는 善에 대한 희구, 즉 理性的 생활뿐이라 믿네.

참된 幸福과 善일 수 있는 그런 생활을 상상하노라면 나의 가슴은 희열로 뛰네. 잘 있게. 지금은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읽고 있는 중일세.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 우리의 진실로 충만된 생활을 위하여.....


1973/9/17


宗敎에 관한 의식은 최고 善의 문제이다. 동물적 개성이 理性의 법칙에 종속될 때 인간다울 수 있지만 理性을 지배하는 또 다른 어떤 存在가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곧 최고의 理性의 존재자이신 神이며 理性이 그의 법칙에 맞게 작용할 때에만 행복의 도덕적 세계가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神의 存在 유무에 대한 논쟁은 形而上學의 마지막 귀결점이며 그러나 인간의 풀지 못할 영원한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어야 할 것인가?

나는 일종의 믿음에 불과할지 모르나 自然에 대하여 공통되는 어떤 오묘한 법칙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神的 觀念을 제외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절대 眞理의 神은 基督敎의 神과 연관하여 直觀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혀 어떠한 관계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人格神으로서 人間을 지배하며 사후까지 따라와서 상벌을 내리는 基督敎的 神은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인간으로 부터 표출된 개념같이만 여겨진다.

오늘 용섭이와의 논쟁은 상극이라는데서 그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같은 인간이면서 어떤 思想에 理性 활동이 서로 철저히 봉쇄당하고 있음은 불행이었다. 理性 한계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理性만이 인간의 유일한 眞이며 인간 자체이다. 어떠한 목적,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理性 활동을 방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바이블의 여호와 경고를 알으켜 주었다. 예레미야 7장 5절-11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다.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이러한 구절을 그가 나에게 보인다는 것은 결국 나의 기독교 관계는 끝났음을 뜻한다. 그들의 평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苦惱를 맛보고 싶고 참된 삶을 진지하게 살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基督敎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직 그런 능력도 없거니와 설사 충분한 근거가 있더라도 비판은 금물이다. 그것도 역시 眞理로 이르는 길일지 모르며 나의 인식 능력 부족 탓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宗敎는 터치해서는 안 되는 높은 곳으로 올려놓자. 그리고 生의 悲哀를 철저히 맛보고 풍만한 마음속에서 깨달음을 찾자. 人間은 人間 그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自我를 超克하여 異邦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이 필요하다. 思想의 정당성 여부를 논할 것이 아니라 평가를 통하여 침잠하자.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할 수 있는 창조적 삶이 되어야겠다.

혼란과 불안의 와중을 벗어난 뒤라야 반짝이는 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孤獨하라!」고 니체는 외친다. 그것은 결국 자기 부정이며 세계를 재평가하는 등불이 될 것이다. 그 길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창조할 수 있다. 빛나는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人間이라면 당연히 思索하고 苦惱하여야 하며 그런 가운데서 원만한 자기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주린 배가 어떠한 음식이라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性慾에 흥분된 심정은 어떠한 대상이라도 가리지 않는다. 일본의 젊은 哲學者 倉田百三은 노숙하게도 육체적 교섭은 惡이며 정신적 사랑만이 최고 善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니체의 ‘肉體가 있고 精神은 뒤다’라는 思想과 반대 개념을 이룬다. 「사랑의 절대경은 희생이되 육체적 교섭은 아니다. 육체적 교섭은 에고이즘의 절대경이다」 그가 청년에게서 육체적 순결을 소중히 여기고 정신적 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것은 독단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같은 청년으로서 그의 思想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人間은 肉과 魂으로 결합되어 있다 할지라도 魂은 魂 자체이지 肉이 간섭할 영역이 아니다. 보통 우리들이 이러한 肉과 魂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위와 같은 두 독단적인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육체행위까지 惡으로 규정하는 倉田식의 思考라면 肉과 精神간의 갈등에서 理性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 세계에서 惡은 존재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理性 작용이 인간 행위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理性만의 독자적인 법칙과 체계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1973/9/18


철저히 自我를 멸망시켜라. 인간의 自我는 병들어 있다. 生의 목표를 잃고 반인간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자기 부정 가운데 새로운 自我는 탄생할 수 있다. 현재의 價値觀을 파괴하고 새로운 건축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신비하고 숭고한 것은 어렵고도 멀리 보인다. 그러나 현실과 타협할 수는 없다. 투쟁적인 人間만이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아! 人間이란 얼마나 허위와 모순에 싸여 있으며 그의 思考는 얼마나 비열한가. 내면의 원숭이로 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善과 德을 창조하자. 人生은 희열의 샘물인 것이다. 그 샘물을 마시자면 들을 지나고 숲을 통하여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야 한다. 안일 속의 낭만은 大地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투쟁을 원한다. 그리고 승리를 원한다. 純潔은 생산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자신을 超越하여 창조하려고 하는 자가 가장 순수한 의지를 가진 자이다. 낡은 권력에의 의지는 파괴되고 創造의 意志만이 있어야 한다. 무기력과 침묵은 최대의 惡이다. 알의 껍데기가 깨어질 때만이 참다운 제 2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는 달이 태양을 잉태한다. 오- 찬란한 人生이여! 나의 가슴으로..... <Nietzsche, Zaratustra에 경의를 표하면서>


1973/9/19


“Aus sprach Zaratustra"를 중간 정도까지 읽었다. 몇 가지 느낀 점을 적어 보아야겠다. 며칠 전까지고 Nietzsche라는 인간이나 그의 思想에 대하여 아는 바란 거의 없었으며 단지 ‘神은 죽었다’라는 명언과 함께 좀 독특한 인간이리라 여겨졌었다. 그러나 Zatustra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은 거인이었다. 비옥한 땅인데도 자라지 못하는 잡초들 사이에서 그만은 무성한 잎과 열매를 결실했다. 그는 참으로 용감한 자였다. 나약한 인간들을 경멸하는 그의 눈초리가 따갑다. 누가 감히 ‘神은 죽었다’고 부르짖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nihilist도 공상적 浪漫家도 아닌 참다운 人間의 創造者였다. 허위로 덮혀있는 人間性을 고발한 고독한 천재였다. 그의 思想이 참다운 人生 긍정이며 生을 찬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는 나의 곁에 있었다. 그는 무조건적인 파괴자가 아니라 창조를 위한 파괴자라는데 그의 가치가 있다. 이 세상의 善이란 그에겐 惡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독단적이었기에 세상의 질시를 받았으며 그는 고독했다. 그러나 그의 과격한 思想은 비판되어 마땅할 것이다. 아니 이 우둔한 人間들에게 각성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Nietsche는 이러한 방법 밖에 딴 것은 찾지 못 했을 것이다.

위대하면서 고독했던 哲人이여! 나와 함께 폭풍의 항해길을 나서자!


1973/9/20


아! 잔인한 人生이여! 그러나 잔인하도록 즐거운 人生이여!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나의 認識은, 나에 관한 주변인들의 認識은 고정되어 있다. 타파하라! 결국 나 자신이 고민하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왜 세상사의 화제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는가? 그리고 科友들은 哲學的 對話는 어째서 잊고 있는가? 그들은 市場의 파리떼들. 나는 創造하련다. 나의 승리, 世人의 평에 무관심이어라.


1973/9/24


우리 人間의 生의 목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幸福의 추구에 있다고 할 것이다. 누구나가 幸福을 갈망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복잡하고 틀에 박힌 일상생활에서 현대인은 不幸의 와중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幸福의 달성에 소홀히 하고 있음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科學의 진보와 사회제도의 획일성은 개성을 상실한 機械的 人間만을 산출하고 있다. 거대한 mechanism 속에서 현대인은 自我를 상실한지 벌써 오래인 것이다. 自我- 主體性의 회복, 이것은 현대 인류의 공통된 중대 과제이다.

人間은 어떤 방법으로 幸福을 되찾을 것인가? 形而上學的인 접근 방법이나 人間意志 중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homo sapiens로서 이성적 희열이 최대의 幸福이랄 수 있으나 반면 幸福은 주로 感情에 좌우된다는데 그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동물적 욕망까지 포함할 수 있는 感情은 그 다양성뿐만 아니라 변화의 예상 불허로서 윤곽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현대는 대다수의 人間에게 不幸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幸福해 질 수 있는 비결은 현재의 향락과 제도, 현실 만족을 거부하고 순수한 인간적인 희열을 느낄 때가 아닐까? 對人關係에서는 결코 幸福해 질 수 없다.

대자연의 신비감이 가슴에 젖어들 때, 소슬한 오솔길을 바람과 함께 거닐 때,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 눈동자를 바라볼 때, 보름달 아래 바다 앞에 섰을 때, 직업상의 목적이 아닌 고상한 취미로서 시간을 즐길 때, 다정한 책 한 권에 감미로운 음악이 있다면....

그 누구가 幸福을 버스 안에서 구하고 네온사인 아래서 구할 것인가? 幸福이란 人間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톨스토이도 ‘人生은 幸福으로의 精進 過程’이라고 했다. 幸福! 저열한 自我 만족을 超克하여 가슴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幸福感에 몸을 떨 수 있도록... 현실과 타협하는 것 보다는 현실을 超克하여 얻을 수 있는 幸福이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1973/9/25


가을을 재촉하는 낙수 소리가 적막감을 더해 주는 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 낮의 소음과 채색된 감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나는 孤獨과 더불어 原始로 돌아간다. 理性이 저 멀리서 손짓을 하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는 인간과 만날 수 있는 저녁 시간. 유난히도 선명히 들리는 빗소리가 마음을 포근히 감싸준다. 잿빛 연기 사이로 아련히 夢想이 피어오른다.

人間을 생각할 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人間을 생각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이 신비스럽고 거대한 宇宙에서 나도 한 시민인 것이다. 나의 存在는 그만큼 귀해진다. 동시에 우리들의 가치도 상상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변색된 현대인은 불쾌감을 자아내지만 人間 자체, 즉 자신을 超克했을 때 나타나는 본래인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 神性이 宇宙와 人間을 창조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神에 구속당하고 있음은 불행한 일이다. 크리스챤들은 ‘아는 것은 번민을 많게 하는 것이다’며 지식의 갈구를 거부한다. 神에 의하여 人間의 특성으로 부여받은 理性작용이 현대에는 罪의 근원시 여겨지고 있음은 바로 그들의 이율배반이 아닌가? 물론 宗敎는 靈的인 면에서 理性의 한계 밖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점을 핑계삼아 독단적으로 人間性을 무시해도 좋다는 논거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의 현실 생활의 관심사중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타인에게는 받아지지 않는다. 이 점을 받아들이게 될 때 나는 寬容과 더 큰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며 自我 중심의 편협한 고민에서 벗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별 영향도 없는 일에 관하여 중대시한 결과 自我만을 괴롭힌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만약 거대한 宇宙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대범해 질 수 있을 것인지? 거기에서 나의 存在를 상상해 보라. 결국 나는 人間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人生을 그 시한만큼 즐기는 것이 神性에 대한 人間의 의무이기도 하다.


1973/9/26


오늘 思想集 10권을 사서 서가에 꽂아 놓고 보니 그 흐뭇한 마음이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읍니다. 요 며칠 사이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읍니다만 心的 상태의 즐거움이란 전에는 흔히 경험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값싼 幸福에 만족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더 나은 창조를 위하여 모든 것을 超克하여야 겠읍니다. 진화 단계상으로 인간이 아직 중간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은 정신면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줄 믿습니다. 더 나은 精神世界를 위하여-.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하는군요. 무슨 계절을 좋아하느냐구요? 지금 같아서는 겨울이라고 대답하겠읍니다. 그 때쯤 되면 화로불의 낭만은 없을지라도 따스한 난로 옆에 앉아서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많겠읍니까? 주전자의 물은 보글보글 끓겠고 창문을 열면 백설의 경관이 마음을 맑게 씻어주고 그 위를 불어오는 북극의 바람은 또 얼마나 싸늘하니 볼을 적시겠읍니까? 그 때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난 幸福을 생각하겠지요. 위대한 思想家들과 이마를 맞대고 人生을 생각할 때 ‘人生은 이렇게도 친밀한 것인가!’하고 감탄을 할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런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찾아오고 그 때면 나는 또 다른 여행자가 되어 있겠지요. 大地를 사랑하는 여행을 말입니다.


-러셀著 「The Conquest of Happiness」 一讀後-


한 달여전 ‘러셀과의 대화’를 통하여 접했던 그의 宗敎觀이나 思想은 나에겐 너무 과격한 것으로 비쳤고 따라서 그런 면에서 러셀도 이해되어졌다. 그러나 속독이긴 하지만 ‘幸福의 征服’을 읽고 난 지금 그의 快樂主義的인 人間觀, 世界觀에 임어당著 ‘生活의 發見’을 읽을 때와 같은 흐뭇한 감을 느꼈다.

幸福은 단순한 것이며 어지간히는 우리들 의지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神을 통해서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人間的인 것을 무시한 편협된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 환경이 우리들 幸福의 절대적인 요건이 되고 있지만 현실을 인정하는 이상 내면적인 幸福은 우리들의 노력으로서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人間은 幸福해 질 수 있다.

自我중심에서 탈피하여 외부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느끼며 거기서 공동체적인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들의 幸福의 근원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宇宙的인 시야를 갖고 人間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不幸의 원인으로서 競爭, Biron적 思考, 倦怠와 興奮, 疲勞, 羨望, 罪意識, 被害妄想, 與論에 대한 恐怖등이 있으나 이런 것들은 점차적인 精神 啓發로서 超克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는 ‘不幸은 統一의 缺如에서 생긴다’고 말했다. 自我와 社會가 객관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고 분열되어 있을 때 그 자신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幸福만을 바라는 나머지 그릇된 사회관과 영합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그 때는 나는 스스로 不幸의 길을 찾겠다. 어리석은 대중들의 행복을 찾느니보다는 孤獨한 天才의 길을 택하겠다. 다만 나의 비개인적 관심을 넓혀서 自我에만 집착하는 利己主義는 되지 말아야겠다. 나는 인류의 한 구성 분자며 독립된 存在로서만 여겨질 수는 없는 것이다.


1973/9/27


Arthur Schopenhauer(1788-1860)

Schopenhauer에 대한 선입감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독특하고 쓴 웃음이 나오는 묘한 감정 말이다. 처음 그의 저서를 대할 때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높은 산을 정복하기 전의 알피니스트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그의 思想에 젖어보고 싶었으며 특출한 그의 재능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일생을 眞理로만 살았다고 자부하는 孤獨한 哲學者, 그의 厭世主義的인 강열한 思想은 논문집에 잘 표현되어 있다. ‘生存 虛無論’ ‘自殺論’에서 엿보이는 그의 면모는 예상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主著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를 읽고 있는 지금 그의 思想의 원류도 역시 Kant이며 Kant의 思想을 능가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음은 기대 밖의 일이다.

‘純粹理性批判’을 읽던 때의 지루하고 땀을 빼던 어려움. 그러나 Schopenhauer의 思想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는 Kant를 위한 입문서의 역할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즉 Kant 思想을 쉬운 말로 열거해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Nihilist인 Schopenhauer의 독특한 思想도 곧 발견될 것으로 믿는다. 그의 예지가 번득이고 그의 哲學이 빛을 발하는 그러한 章을 읽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닌가?

‘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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